“이기고 나의 행위를 끝까지 지키는 자에게는 내가 민족들을 다스릴 권능을 주리니”(계 2:26)
지금까지 이 강의는 주님을 따르는 것에 관해 일반적인 형태를 제외하고 믿는 이들의 선한 일들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강의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영적 은사로 예배드리는 것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사역함으로서 우리의 선한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믿는 이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인 생활의 이런 방면에서 승리할 수 있게 되는지를 보기 위해 주의를 돌린다.
예수는 우리의 본이시다.
우리는 예수께서 선한 일들을 수행하는 방법을 관통하도록 우리에게 제공하셔서 순수하신 사람으로서 아버지를 의지하신 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느니라. 이는 아버지께서 무슨 일을 하시든지 그 일을 아들도 그와 같이 하기 때문이니라. *또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를 놀라게 하시리니”(요 5:19~20)
이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시고 그 일만을 하셨다는 것을 본다. 아버지께서 하시고 계시는 그 일을 그분께 계시하시고 예수 안에서 일하시고 계셨다. 그리고 또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계시와 그분과 연합하셔서 일들을 수행하심을 따라 하셨다.
“그러나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끝마치게 하시는 일들 곧 내가 행하는 바로 그 일들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해 증거하기 때문이요,”(요 5:36)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 그분께서 예수께 주셔서 성취하도록 하실 특별한 일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많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의 어떤 일 때문에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요 10:32)
이 구절에서는 우리가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이 “아버지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본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일들의 원천이셨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독자적이거나 그분 자신께서 만들어 낸 그분의 일들을 파생시키시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분은 사역사시는 그분의 일들의 원천이 아버지이셨다는 것을 선언하셨다.
“내가 만일 내 아버지의 일들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요 10:37)
다시 말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분이 수행하신 그 일들이 그분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었다는 것을 주장하셨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것처럼 십자가로 가시기 전날 밤에 예수께서 놀라운 기도를 하셨다. 의미심장하게도 그분은 그 기도에서 그분의 아버지께서 선언하라고 하신 것을 하셨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끝마쳐서 아버지를 땅에서 영화롭게 하였나이다.”(요 17:4)
다시 한 번 우리는 예수께서 땅에서 행하셨던 것의 창설자가 아니셨음을 본다. 오히려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해야 할 것을 그분께 특별하게 주신 그 일을 수행하셨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계획하시고 그분께 계시하셨던 그 선한 일로 아버지를 따라 행하셨다는 생생한 그림과 함께 성경 구절을 보자. 이러한 본은 그분의 따르는 자들의 삶에서 복사판이 되셨음을 보여준다.
하나님과의 협력자들
성경은 선한 일을 하도록 우리를 격려한다. 예를 들어 디모데전서에 따르면 여자들은 선한 일들과 함께 그들 자신을 단장해야 한다(딤전 2:10). 디도(타이터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주심은 모든 불법으로부터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고 우리를 정결하게 하사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는 백성 곧 자신을 위한 특별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라고 선언한다. 히브리서에서 우리는 우리가 “서로를 살펴보아 사랑과 선한 행위에 이르도록 격려하되”(히 10:24)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선한 행동을 할 우리를 원하신다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분과 그분의 하시는 일에서 떨어져 일들 하는 우리를 원하시지 않으신다. 이번 강의는 아버지의 일을 행하시는 예수의 본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안함과 일로 인해 “하나님을 위한” 선한 일을 시작하지 않고 또 꿈꾸지 않는 것에서 실제로 해방 받고 있다. 대신에 우리는 그분을 추구하고 그분과 함께 교제함으로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들어가야 하는 곳으로 우리 앞에 제시하실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들을 위하여 창조된 자들이기 때문이니 하나님께서 이 일들을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이것은 그분을 위해 할 어떤 것과 함께 걷는 것에 관해 평안한 생각을 준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기도하고 암송해야 할 구절이다. 나는 그분께서 나를 위해 준비하신 선한 일 안에서 걷기를 원한다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어느 다른 일들을 하는 것에 관해서 관심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시간보다 빨리 일을 준비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은 또한 그분의 뜻에 따른 확신하는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 소망과 생각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이는 너희 안에서 일하시며 자기가 참으로 기뻐하는 것을 원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빌 2:13)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배하신 영적 일을 하도록 우리를 위해 힘을 공급하신다. 주님을 위한 크게 수고했던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 15:10) 고 언급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골로새 교회에게 말했다.
“이것을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강력하게 활동하시는 분의 활동(힘, 일)을 따라 힘쓰며 수고하노라.”(골 1:29)
전에 강의에서 했듯이 이기는 이들의 마음과 훈련으로 주님을 추구 하는 것이다. 우리가 영적인 일을 할 때 그분은 확신하시는 일을 하도록 그분의 소망을 우리 안에서 하신다(빌 2:13, 대상 17:2, 느 2:12). 그 다음 우리는 그분께서 해야 할 것을 우리에게 주신 행위들을 수행하기 위해서 순종으로 그분을 따른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하나님과의 협력자들이다. 바울은 그와 그의 따르는 조력자들은 고린도교회에게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으로서 그의 사역을 말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일하는 일꾼으로서 너희에게도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
내 체험으로는 하나님께서는 종종 생각이나 이해가기 어려운 격려로 일을 시작하신다. 만일 그 일이 다소 복잡하고 일정 기간이 지나서 일어난다면 하나님께서는 보통 그 일을 수행하는 것에 관해서 상세하게 공급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대개 우리가 과제의 각 단계를 강행하는 것에 관해서 기도로 그분을 추구할 때 나타난다. 그러나 그 일을 시작하는 것에 동의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것을 아는 것이 필요로 할 때 나타내시어 각 항목을 생각나게 하셔서 믿음이 있게 하실 것이다. 이것은 믿음의 방법이다. 아브라함은 그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부르심을 알았으나 그 가 가야하는 곳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는 그 땅을 떠남으로 인해 책임을 다했고 하나님께서는 한걸음씩 그를 인도 하셨다.
또한 우리가 그분과 함께 일하는 것은 우리가 취해야 하는 행동을 매 순간마다 상세한 지식을 가질 것이라는 의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바울을 마케도니아에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부르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가서 그에게 말하라고 하였으나 저 사람에게는 하지 말라고 개개인에게 노예와 같이 바울을 지시하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현장에서 모든 기회에 전파하러 나갔다. 그는 누가 책임을 지기 위해 앞장서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요 3:8). 그가 기도하는 곳인 여자들의 그룹에서 전파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으로 루디아라고 하는 한 여인의 마음을 여셨다(행 16:13~14). 그러나 보기 드문 특별한 일일지 모르나 우리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가질 때 그분께서는 어떤 사역의 유형을 위해 특별히 낯선 사람에게 우리를 지시하실 수 있다.
종종 우리의 봉사하는 곳은 우리가 교제하는 성도들 한가운데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살려고 찾을 때 그분은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 주위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나 격려하려는 소망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주님을 의지해서 봉사를 수행한다.
브루스 윌킨슨은 주님을 위해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은 사역을 위해 큰 계획을 세우가나 더 많은 활동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기억하도록 한다. 오히려 그것은 주님 안에서 사는 문제이다. 윌킨슨이 그것을 말하려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위해 더 하려고 할 때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더 있으려고 할 때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하는 생활 안에서 진실로 살 때 열매가 자연적으로 맺게 될 것이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같이 너희도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 15:4)
우리가 선한 일을 생산하기 위해서 단순히 그리스도 안에서 머물 필요가 있다는 말은 이와 같은 일들에 관해서 모두 말하게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간간한 계획을 넘어서 선한 일에 관해 어떠한 경계들과 격려들을 우리에게 주신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분께 우리 봉사 안에서 흔적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서 이 말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 우리 섬김에 관해 어떠한 하나님의 중요한 암시는 아래에서 다루었다.
우리 일의 순수함과 시험
만약 우리의 일들이 진실로 그분 안에서 우리가 머무는 것으로 주어진다면 이런 일들은 하나님에 의해 인정될 것이고 또 우리가 심판의 날에 그것들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서 하고 있는 일들”있다는 것이나 겉으로 보기에는 그분과 함께 연합되고 적셔지지 않았다. 주님을 위해서 아주 바쁘게 될 가능성이 있지만 그분 안에서 거하고 있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 일들의 순수함에 위한 필요에 관하여 일깨우게 될 우리를 돕게 될 것이고 또 사실 우리 일들이 하나님에 의해 시험을 받게 될 것이다. 다음의 몇 가지 조언들은 우리 일들의 순수함을 시험하기 위한 항목으로서 도움 줄 것이다.
고린도교회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 나는 그 교회를 건축하고 있었던 믿는 이들이 육체적인 것과 관련해서 지금 집중하기를 희망한다. 바울은 그들은 건축하고 있는 그들의 방법이 옛 본성, 육체에 따른 것, 즉 육신에 속한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그들에게 말했다(고전 3:1~4). 그는 그런 다음에 믿는 이들의 일을 심판대에 오는 것에 관해 그들에게 경고하는 것을 계속했다.
“이는 이미 놓은 기초 외에 능히 다른 기초를 놓을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니 이 기초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건초나 짚으로 이 기초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일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그 일을 밝히 드러내리니 이는 그 일이 불로써 드러나고 그 불이 각 사람의 일이 어떤 것인지 시험할 것임이라. *누구든지 그 기초 위에 일을 세웠는데 그 일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 보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일이 불타면 보상을 잃게 되리라. 그러나 그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로써 받는 것 같으리라.”(고전 3:11~15)
이 말씀은 우리가 건축하고, 또 주님을 위해 사역하는 것을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를 우리에게 경고한다. 경계의 이 말씀은 우리가 그분께 정말로 나아갈 때 무엇이 확실한지를 점검함으로서 도움이 된다. 금, 은, 그리고 보석은 불을 통과할 수 있다. 따라서 이것들은 천연적이고 또 그들의 요소로서 하나님께 속한 일들을 의미한다. 나무의 성분, 풀과 짚은 이 하나님의 심판대에 옴으로 인해 다 타버린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은 천연적인 사람, 육체적인 것이 나오는 일들을 의미한다.
천연적인 사람은 어떤 것들, 심지어 “하나님을 위한”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해 시기와 열심 있는 힘을 사용할 수 있다. 틀림없이 우리를 균형 있게 말씀과 힘이 없이 하는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의 일을 하기 위한 압박이 하나님의 것들이라고 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어떤 것을 이루기를 목표삼아 조직들과 행동 계획들, 바쁜 회의의 모든 유형들로 사역들을 증가 시키고 있다. 이것은 얼마나 많은 육체의 수단들과 힘에서 벗어나 있는가?
우리의 원천으로서 우리 자신을 벗어나서 우리를 돌보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나 오직 하나님께서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또 행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하나님께 동의하여 모든 일들이 십자가 아래에서 되는 것을 필요로 해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존재한다는 모든 것에서 기꺼이 죽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그분의 일을 효과적으로 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분은 남자든지 여자든지 재능을 필요로 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모든 것이 되시기 위해 남자든 여자든 자신을 기꺼이 죽을 필요가 있다. 자신의 모든 노력, 모든 인간의 고안, 주창, 흥미는 하나님을 깨닫게 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가야 한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순수한 마음으로 믿음에 의해 입장을 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전적으로 그분을 의지하여 봉사한다. 우리가 믿음에 의해 하나님을 섬기기를 향해 기꺼이 움직이기 전에 특별한 영적인 것이나 거룩한 것의 어떤 느낌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동적이지 않다. 우리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또 십자가 위로 스스로 함께 있게 하여 믿음 안에서 그분을 섬기고, 그분을 찾으려고 활동한다.
이 점에 관해서 나를 공격했던 한 구절이 빌립보에 보낸 편지에 있다.
“그러나 내가 속히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예수님 안에서 바람은 너희 형편을 알게 되어 나도 좋은 위로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마음을 같이하여 너희 형편을 자발적으로 돌아볼 자가 디모데밖에 내게 없기 때문이라. *모든 사람이 자기의 일을 추구(追耉)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추구하지 아니하되”(빌 2:19~21)
우리가 무슨 이유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가? 그것들이 자신의 흥미, 다른 사람들에 의한 인정과 같은 인기, 금전적인 이익, 아니면 우리 자신의 사역의 영역 등이 포함되는가? 주님을 섬기는 방법이 무엇인가? 우리는 “귀를 만족시키는” 매력적인 메시지, 대중적인 홍보 계획, 사람들의 육체를 즐겁게 하는 오락, 세련된 미사여구와 지혜의 능란한 말씀(고전 2:1~5) 혹은 심리학적인 것을 사용하는가?(딤후 4:3) 우리는 주님을 위해 “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 “영의 새로움(우리 영 안에서 거주하시는 살아계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 안에서 섬기는가 아니면 율법의 자의(字義)의 옛것에 밀려 힘들게 걷는가?(롬 7:6)
우리가 주님을 섬기기 위해 추구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오고 있다는 것과 또 불로 인해 우리의 봉사를 제련 할 것이라는 사실을 항상 인식하자.
“이는 내가 자원하여 이것을 행하면 보상(湺尙)을 얻으려니와 자원하여 하지 아니한다 할지라도 복음의 청지기직을 내가 맡았기 때문이라.”(고전 9:17)
그리스도의 종의 가장 큰 예는 사도 바울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셨던 청지기직을 끊임없이 인식하고 있었다(고전 4:1, 9:17, 갈 2:7, 엡 3:2, 골 1:25). 그는 믿음이 있어야만 하나님 것들을 관리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역자요, 하나님의 신비들을 맡은 청지기로 여길지어다. *또한 청지기들에게 요구할 것은 신실한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전 4:1~2)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는 청지기직분을 위탁받은 그리스도의 종이다. 예수께서는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그분의 달란트 비유(마 25:14~30)와 므나 비유(눅 19:12~27)로 아주 명쾌하게 하셨다. 그러나 이 책임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아주 쉬운 것이다. 문제의 일부는 부자연스런 계급조직(성직자와 평신도 - 이 말은 우리 교회 안에서는 사용하지 않음)이다. 이 비성경적인 조직은 하나님과 진통을 겪는 책임과 진실로 청지기직분을 가지는 많은 사람들 중의 유일한 한 사람으로서의 성직자 생각이 평신도를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위의 기록된 비유에 의하면 청지기직분을 갖는 것은 사실은 결국 우리 각자의 것이 되는 것이다. 신약 성경은 섬기기 위해서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에 의해 은사가 주어져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런즉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따라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으니 대언이면 우리가 믿음의 분량대로 대언하고,”(롬 12:6)
“각각 은사(恩賜)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로서 서로 그 은사를 써서 섬기라.”(벧전 4:10)
게다가 우리 봉사를 그만두게 하는 계급조직의 문제를 주님께서 마태복음 25:14~30에서의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적은 은사를 가진 성도들은 그들에게 거는 주님의 기대를 두려워하고, 또 게으르기 때문에 믿음이 없다고 하셨다(마 25:24~26). 비슷한 설명이 다른 비유로 주셨는데 거기서 사악한 종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눅 19:20~23). 누가복음 19의 비유에서 모든 종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구원과 새 생명을 예시하는 같은 몫을 받았다. 그들의 이윤(생산능력)이 다른 것은 믿음으로 주님을 위한 수고하는 것이 그들의 상대적인 믿음에 달려 있었다.
우리 가운데 주님의 임재와 축복을 즐기고 싶어 하는 경향이 될 수 있으나 믿음 있는 청지기가 될 필요에 애쓰고 또 믿음의 훈련을 기피한다. 주님을 섬기는 것은 자기 부인(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인정받기 위해서 우리의 소망과 물질과 시간을 사용하기 원하는 방법)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또한 어떤 점에서 우리가 그분을 의지하는 신뢰로 우리의 섬김에 앞서 감동되어 주님을 추구하는 믿음의 훈련을 필요로 한다. 로마서 12: 3~6에서 각자의 은사를 훈련할 만큼 하나님께서 각각 믿음의 분량대로 분배하심을 보여준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믿는 이들이 수행해야할 “믿음의 일”을 말했다(살전 1:3).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동역자들로 믿음을 가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통해서 믿음에 기꺼이 수고할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특정한 사람(성직자)만의 생각을 떠나야만 하나님을 위해 영적인 일을 진정으로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은사의 본성이나 크기를 경멸하지 말아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것으로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준비 과정으로 우리는 청지기직분의 우리의 책임을 더 완전하게 이행할 수 있다.
“우리가 잘 행하다가 지치지 말지니 이는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면 정하신 때에 거둘 것임이라.”(갈 6:9)
선한 일로 승리하게 될 우리에게 또 다른 방해물이 있는데 그것은 낙심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특히 우리 수고의 결과가 보이지 않을 때 낙심될 경향이 있다.
최근 나는 새로운 부족을 사역하는 부부의 이야기를 읽었다. 그 아내는 15년 동안 선교 현장에서 있었기에 어느 정도 관계가 있었다. 마침내 그들이 너무 오랫동안 수고를 했고 또 회심하는 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완전히 낙심한 그녀는 포기할 준비가 되었다고 남편에게 소리를 질렀다. 남편은 비록 그들의 일생동안 볼 수 없다할지라도 믿음으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을 부드럽게 상기시켰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결과로 주님을 위해 수고를 계속하는 근거가 되지 말아야하나 우리 청지기 직분에 믿음이 요구된다(고전 4:2). 덧붙여 말하면 선교사 이야기는 그 말을 한 후 몇 달을 계속해서 말했다. 그 이후 몇 명의 회심자들이 일어났으며, 또 그 일은 꽃이 피기 시작했다. 우리 영적인 은사들을 훈련하는 것 안에서 우리가 파종하기 시작하고 잠시 후에 좋은 것을 수확하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다. 다음 구절을 보자.
“우리가 잘 행하다가 지치지 말지니 이는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면 정하신 때에 거둘 것임이라.”(갈 6:9)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얻어 이 사역을 맡았은즉 힘을 잃지 아니하며”(고후 4:1)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는 자가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알기 때문이니라.”(고전 15:58)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오실 때까지 인내하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받을 때까지 오랫동안 인내하느니라.”(약 5:7)
[비록 이 구절이 주님의 다시 오실 동안 기다리는 것에 관해서 말하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씨를 뿌리고 추수하기까지 끈기 있게 기다려야 하는 농부의 원리를 보여준다.]
결론
우리는 선한 일로 승리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소망과 우리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 어떤 것에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분은 앞으로의 시간을 우리를 위한 일을 계획하고 또 그것들을 수행할 힘과 영적인 은사로 우리를 공급하신다. 우리는 선한 일로 승리하기 위해서 그분 안에서 거주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도울 수 있는 생각을 제공한다.
❶육체로부터 하나님을 위한 산출된 일에 관해 주의하라.
❷나태해지고 게을러져 우리 은사를 멸시하지 않음으로 인해 우리 청지기직 안에서 믿음을 가지라.
❸마음을 잃지 마라. 그러나 주님을 위해 수고하는 것을 계속하라. 그분 안에서 우리의 일을 아는 것은 포도나무 안에 있는 것이 아니지만 계절이 되면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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