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ethren/연(輦)모임 메시지

살아 있는 희생

Hernhut 2023. 6. 25. 00:23

 

 

로마서 12:1

 

로마서 12:1에서 바울이 로마에 있는 형제들에게 권고한 것은 목적, 즉 그들의 몸을 산 거룩한 제물로 드리기 위한 것이었다. "드리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레위 지파의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희생 제물이라는 단어는 레위 사람들의 제물과 제단에서 불에 태워지는 희생의 형상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 희생 제물은 죽임을 당한 동물이었지만 바울의 권고는 산 제물이 되라는 것이다. 주 예수님의 죽음과 그분의 피 흘림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땅에서 생활하고, 행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 드려진 희생 제물이 될 수 있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또한 우리 자신을 이렇게 드리는 것이 우리의 영적 예배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헬라어 로기코스 라트레이아logikos latreia에서 번역되었다. 두 번째 단어인 라트레이아latreia는 하나님의 신성한 봉사 또는 사역을 나타내며 예배로도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NASB 번역본은 그것을 예배 봉사로 번역한다. 첫 번째 단어인 로기코스logikos합리적인으로 번역되는 것이 가장 좋으며, 헬라어 로고스logos에서 직접 파생되었으며 말씀의로도 번역될 수 있다. 대부분의 영어 사용자에게 합리적인적합한또는 적절한이라는 생각을 전달할 수 있지만 로기코스logikos는 실제로 합리적을 의미한다. 영적 예배합당한 봉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높은 이유와 일치하게 내적 결정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봉사.

 

계시와 적용

 

우리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분과 함께 설 때, 우리는 우리 주위의 성도들과 함께 거룩하고, 열납될 만하며,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산 제물이 될 것이다.

 

달콤한 향기

 

구약에서 제단에 불에 태워진 제물은 주를 달래는 향기를 만들어 냈다(레위기 1:9). 로마서 12:1에 나오는 살아 있고 거룩한 희생이라는 구절은 우리가 영적인 환난을 겪는 것, 즉 불에 타서 재가 되어 하나님께 향기로운 향기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고, 불태우시고, 조각하시도록 기꺼이 용납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많은 환난을 겪을 것이다. ‘내가 수고와 고난 중에 여러 날 밤을 지내며 주리고 목마르며 먹을 것이 없고 춥고 몸이 쓰러져 있더라라고 말한 사도 바울을 생각해 보라(고린도후서 11:27). 그는 명예와 불명예, 악한 소문과 좋은 소문을 체험했고, 진실했지만 속이는 자로 여겨졌다(고린도전서 6:8). 우리도 환난으로 가득 찬 삶에서 그러한 일들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체험은 우리를 좌절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께 달콤한 향기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희생 제물은 먼저 도살된 다음 제단 위에 놓이고 마지막으로 불에 타 재가 되었다. 신약에서 우리는 살아 있고 거룩한 희생이다. 첫째, 우리는 살고 있다. 우리는 항상 불타고 있지만, 결코 완전히 소진되거나 마르지 않는다. 우리는 잠깐 불타지 말고, 주님을 따르는 한 불타올라야 한다. 우리 안의 석탄은 강하고 지속적으로 타오르고 있어야 한다. 희생 제물로 불에 타는 이 체험은 우리가 주님을 보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둘째, 우리는 거룩하다. 우리는 오늘날 많은 사람 가운데서 산 제물이다. 우리의 몸을 주님께 바침으로써 우리의 삶은 다른 사람들의 삶과 달라지게 된다. 다른 사람들은 여러 가지 목적을 위해 살 수 있지만, 우리의 삶은 오직 한 가지 목적, 즉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산 제사와 달콤한 향기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함

 

구약시대에는 제물을 먼저 도살한 후 불태웠기 때문에 죽은 제사라고 볼 수 있다. 신약 시대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부활에 적용한다(빌립보서 3:10). 우리는 죽은 제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제물이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이러한 희생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성도들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어야 하며, 우리가 그분의 부활 안에 거하는 것처럼 그분의 죽음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불태우시고, 조각하시고, 다루시고, 치시는 과정을 체험하는 산 제사다. 그러나 이 과정은 매우 달콤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을 통해 우리가 그분와 그분의 부활의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제와 그분의 죽음을 본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빌립보서 3:10).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고난의 교제에 들어갈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죽음을 본받을 수 있는가? 그것은 그분의 부활로 그분의 죽음을 체험함으로써 가능하다.

 

우리가 그분의 부활 안에 거하는 동안 그분의 죽음이 우리에게 역사할 때 우리는 영적인 환난을 체험한다.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그분의 부활 생명을 누리고 적용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은 결코 성도들과 함께 그런 희생 제사가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합리적인 봉사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은 오직 부활 안에서만 완성된다. 이 드림은 하나님과 관련이 있고, 거룩하며, 하나님과 일치하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 드림도 봉사다. 바울은 그것이 우리의 예배의 영적 섬김또는 합당한 섬김‘(로기코스 라트레이아logikos latreia)이라고 말한다.

 

참된 봉사는 일회성 행동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서는 삶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설 때, 우리는 그분을 섬기는 것이다. 산 제물이 되는 것은 우리의 삶과 생명의 문제이며, 이것은 우리의 합리적인 봉사다.

 

헬라어로 합리적인‘(로기코스logikos)의 어원은 로고스(logos), 하나님의 경륜의 본질, 성품, 취향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사용된다. 말씀(logos로고스)은 살아 있고 활동적이다(히브리서 4:12). 따라서 합리적이라는 말은 단지 우리의 정신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신성한 생명의 공급(’살아 있는로고스logos)과 강력한 작용(’활동적인로고스logos)을 나타낸다. 우리가 하는 많은 일이 종교 봉사의 영역에 있을 수 있지만, 로고스logos에 의해 그리고 로고스logos에 따라 생성된 봉사는 합리적이다. ‘합리적인 섬김은 논리적인 섬김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영양을 공급하고, 능력을 주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섬김을 의미한다.

 

봉사’(라트레이아latreia)는 또한 예배를 의미하며, 특히 제사장의 봉사를 나타낸다. 이 봉사는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경건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공급하고 사람들을 하나님께 선물한다. 이것이 신약성경의 제사장 직분이다(베드로전서 2:5).

 

봉사는 생명의 공급, 성장, 건축과 관련이 있다. 사도 베드로는 그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베드로는 갓난아기 같이 말씀의 순결한 젖을 사모하여 너희로 말미암아 구원에 대하여 자라게 하려 함이라.....너희도 산 돌로서 거룩한 제사장들을 위한 신령한 집으로 건축되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제사를 드리고 있느니라라고 말했다(베드로전서 2:2, 5). 거듭남을 통해 우리는 영적인 아기로 태어나 말씀의 순결한 우유의 자양분으로 구원에 이르는 생명으로 성장해야 한다. 성도들이 성장하도록 돕는 모든 봉사에는 말씀의 자양분이 포함된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성장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인 집과 거룩한 신권에 이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