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음료/복음칼럼

가인과 아벨의 제물

Hernhut 2018. 5. 12. 00:30

결국,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께 각자의 제물을 드렸다. 두 생명 방식은 두 다른 제물의 결과를 가져왔다. 가인은 땅의 열매즉 농사를 지은 것에서 나온 어떤 것을 제물로 드렸다. 아벨은 가축의 첫 것즉 그의 목동 생활에서 얻은 어떤 것을 제물로 드렸다(4:3-4a). 그때 하나님 자신은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때까지 사람이 대면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바라보지도 않으셨다고 기록한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만 바라보셨다(4:4b-5).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보시고서 가인아, 넌 이것을 개선하는 것이 필요했어. 넌 잘하지 못했어.”라고 말씀하셨더라면 가인이 그렇게 굴욕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가인이 회개할 수 있었을 것이고 더 나아가 미래에는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인을 무시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으셨다. 어떤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가인과 그의 제물을 보지도 않으셨다. 대신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로 직접 가셨다. 아벨의 제물에 대한 하나님의 누림은 가인에게 있어 깊은 고통이었다.

왜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을 받아주시지 않았을까? 왜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을 누리셨는가? 우리는 하나님과 논쟁할 수 있다.

당신은 아담에게 땅을 경작하라고 말씀하신 분이십니다. 가인은 그의 아버지가 땅을 경작하라고 말한 것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의 제물을 거들떠보지도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만 좋아하셨습니다. 이건 불공평하지 않나요?”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답을 주신다.

너희는 모른다. 사람이 타락한 이후 아무도 나를 똑바로 보려 하지 않는다. 나를 보기를 원하는 어떤 사람은 내가 그들을 위해 준비한 나의 구원을 얻어야 한다. 아벨의 제물은 애 구원의 비전을 따른 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그의 제물을 받아들인 이유다.”

주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침례자 요한은 그분을 보고서 말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1:29)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그리스도는 아벨이 제물을 드린 양으로 예표 되었다. 양떼의 첫 새끼로 드린 아벨의 제물은 그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구원을 따라 하나님께로 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벨의 제물은 비전에 따른 것이었다.

한 면에서 왜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을 쳐다보지도 않으셨을까? 가인의 제물은 단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객관적인 지식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가인의 제물은 종교의 영역에 있었다. 가인은 하나님 구원을 얻는 것 없이 자신의 일로 나오는 결과만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다. 그러므로 그의 제물은 그가 하나님께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가인의 노선은 지식의 노선이다. 가인의 노선은 논리를 사용하는 노선이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식량을 위해 땅에서 수고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농부가 되었다. 이것은 논리적인 것이었다. 그런 후에 그는 땅의 열매 어떤 것으로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을 거절했다.

다른 면에서 아벨은 그의 육체적인 생존과 관련이 없었다. 당시에 사람들은 고기를 먹지도 않았다. 그래서 아벨의 목축은 생존과 관계가 없었다. 아벨은 식량을 위해 농사도 짓지 않았다. 아벨이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형의 농작물로 살아가야 했다. 하지만 아벨은 그가 하나님을 보기 원했다면 양가죽으로 덮여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목동이 되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에 반응하셨고, 아주 기뻐하셨다. 아담의 이 두 아들은 하나님께 어떤 것으로 제사함으로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가인의 제물은 논리적인 것을 따른 반면 아벨의 제물은 비전을 따른 것이었다. 이 두 제물은 아주 다른 결과를 산출했다. 하나님께서 하나는 거절하시고, 다른 하나는 기뻐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