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음료/새벽이슬처럼

하나님께서 완전히 나를 아시고, 나를 여전히 사랑하실 수 있으실까?

Hernhut 2016. 5. 5. 14:15


 

나는 자주 내 자신에 대해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완전히 아신다면 그분께서 나를 사랑하실 방법이 없으실 거야. 나의 죄는 너무 추하고, 나는 너무 상했어. 난 너무 많이 지나가 버렸어.” 현실은 내가 너무나 틀렸다는 것이다. 성경은 내게 말해 준다. 복음에 관한 많은 아름다운 것들 중의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께 완전하게 알려졌고, 완전하게 사랑받았다는 것이다. 얼마나 참된 아름다움인지!

시편 139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잘 아시는지 아름답고 소름끼치게 설명한다. 이 시가 소름끼칠 정도의 시라고 동의하는가? 우리가 하나님 외에 우리를 아는 어떤 누구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면 우리는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도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를 정말 사랑하실 수 있도록 분투한다. 왜 그렇게 하는가? 우리가 예수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행하신 것 보다 오히려 우리가 행한 것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의미를 두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당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죄가 되게 하셨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고 하신 그분의 뜻이었다(고후 5:21).

 

예수님을 통해 살아남

 

우리는 십자가의 능력을 생각하는데 시간을 거의 보내지 않지만 우리의 실수를 생각하느라 정말 많은 시간을 보낸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능력을 죄에게 줄 수 없다. 로마서 6:6절은 더 이상 우리가 죄의 종이 아니라고 말한다. 로마서 6:10-11절은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를 위해 단번에 죄에 대해 죽으셨다고 말한다. 우리는 죄에 대해 이미 죽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살아났다. 우리가 죄인일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그분의 사랑을 확증하셨다(5:8).

너무나 자주 듣는 말씀이지만 나는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본다. 비록 우리가 죄인이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셨고, 그런 사실로 그분은 우리를 위해 그분의 아들을 보내셔서 죽게 하셨다. 그분은 어둠의 사슬을 끊으시고, 막힌 돌을 굴리셨다. 그럼으로 해서 우리 모두는 무덤 밖에 계시는 그분을 만나러 달려갈 수 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흔들리거나 바뀌지 않으시고 변함없고 확고하시다.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수님의 능력은 죄 짓는 것을 멈추게 하지 않는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이 우리의 죄보다 더 깊을 때 죄 짓는 것을 멈추게 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어떤 사람을 더 잘 알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시는 것보다 더 큰 평안을 주지 못한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아시고, 우리를 완전히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그분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