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ethren/연(輦)모임 메시지

천국에 관한 가르침

Hernhut 2014. 8. 13. 13:00

이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하늘의 왕국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은 서기관마다 마치 자기 보고에서 새 것과 옛 것을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하시니라. (13:52).

 

하늘왕국을 둘러싸고 있는 메시지(13:11, 19, 24) 즉 왕국 말씀은 신약성경의 중심적인 메시지입니다. 복음서, 사도행전, 서신서, 요한계시록 등 모두 중심적인 메시지는 왕국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 메시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가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을 연구함으로서 더 합당한 기초를 소유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메시지가 이해되지 않는 사람은 신약 성경의 어떤 부분을 연구해도 악영향을 줄 것이고, 합당치 않은 것을 소유할 것입니다.

 

이것은 왕국말씀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성도들이 집주인과 같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들이 성경으로 가서 옛 것을 가져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옛 것으로부터 온 것을 보기 시작할 수 있고, “새 것을 가져올 수 있을 것입니다. “옛 것은 이미 보고, 이해했던 것이요, “새 것은 아직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원문에 의하면 집주인은 하늘왕국으로 가르침을 받았기때문에 이것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에 대한 열쇠를 소유합니다. 이 열쇠는 그들이 닫혀있던 성경의 수많은 구절들을 열 것입니다. 이와 같이 왕국말씀에 관한 새로운 것들을 연구하고 배운 성도들은 계속해서 점점 더 많이 옛 것을 취하고, “새 것을 찾고, 이해하는 자신을 알 것입니다. 성도들이 왕국말씀을 이해하면 할수록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성경이 열리는 것을 볼 것입니다. 나중에는 옛 것과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되고, 그것에 의지하게 됩니다.

 

왕국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성경지식을 추구함으로 각 성도들이 충분해질 것입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체험과 증거했었지만 그들이 말해야 할 때 이것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변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게 왕국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성경으로 갈 수 있도록 하며 새 것과 옛 것을 제한하지 않고 보물들을 이 창고에서 가져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왕국말씀을 이해하는 것을 제외하고 각 사람들이 진리들을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고 할지 모릅니다. 다시 마태복음 13:52절을 봅시다. 이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하늘의 왕국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은 서기관마다 마치 자기 보고에서 새 것과 옛 것을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하시니라.” 하지만 그 같은 상황은 여기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이 왕국 말씀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현제도에서 말씀을 대항하는 사탄의 공격입니다. 이 모든 가르침의 중심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왕국말씀에 대한 이해는 그리스도인과 관계가 있고, 또 사탄이 이것을 아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왕국말씀에 대한 이해는 성경을 이해하는데 큰 열쇠입니다. 사탄은 그가 왕국말씀과 관련된 수많은 다른 성경에 대한 합당한 이해로 문을 여는 것을 막고, 멸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오늘날의 사역목적을 가장 좋게 이루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 끝을 향한 사탄의 노력은 마태복음 13장에 있는 처음 네 비유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 네 비유는 왕국말씀을 전복시키려고 하는 사탄의 일의 연대기에 나타나있습니다. 이 연대기는 온 제도 전반에 걸쳐 그의 일에 대해 점진적인 결과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처음 씨 뿌리는 자에 대한 비유에서 사탄의 공격(13:3~8, 18~23)은 왕국말씀을 들은 사람들에 대한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그 점에서 문제가 멈추기를 모색했습니다. 그는 이 메시지를 이해하는 것을 막고,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메시지에 반응하는 4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넷 중 셋은 사탄의 공격에 쓰러졌습니다. 넷 중 처음 셋은 넘어졌고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사람에 대한 사탄의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들었고,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사탄의 공격을 이겼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다음 비유는 알곡과 가라지 비유입니다(:24~30, 36~43). 사실 이 비유는 첫 번째 비유와 연결되는 비유입니다. 앞의 비유에서 열매 맺는 사람에 대항하는 사탄의 공격에 중점을 둡니다. 사탄은 열매 맺는 자들 한 가운데서 그들을 거짓 메시지, 거짓 교사들에게 맡깁니다. 사탄은 메시지를 전복시키려고 합니다. 왕국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을 중지시키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사탄은 거짓메시지를 소개함으로 참된 메시지를 하락시키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참된 메시지의 선포로 인해 멈춰졌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열매를 맺음으로 멈춰졌습니다.

 

다음 비유는 겨자(머스타드)씨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앞의 알곡과 가라지 비유에 이어지는 것으로 이 거짓 메시지 때문에 이 제도가 흐름에 따라 기독교에서 일어난 것을 보여줍니다. 겨자(머스타드)씨는 발아되어 잠시 동안 정상적으로 성장을 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난 후 그것은 비정상적으로 자라고, 결국 비정상적인 나무가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 비정상적인 성장이 일어난 후 공중의 새들(첫 번째 비유에서 볼 수 있는 사탄의 사역자들) 이 그곳에 깃드는 장소로 알았습니다.

 

다음 비유는 완전한 그림이 되는 누룩의 비유입니다(13:33). 거짓 메시지는 제도 시작 무렵에 선포되었습니다. 거짓 메시지는 누룩으로 밀가루 서 말을 부풀게 했습니다. 신성한 완전을 의미하는 숫자는 “3”입니다. 밀가루는 주식인 빵을 만드는 것입니다. 누룩(부패시키는 물질)은 밀가루에 있었습니다. 결국 누룩은 빵을 부패시키는 것입니다. 이 누룩은 모든 빵이 부풀 때까지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거짓 메시지는 계속해서 침투할 것이고, 참된 메시지를 하락시킬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왕국말씀과 관련 있는 거짓 메시지와 누룩에 대한 메시지에 이어서 왕국말씀과 관련 있는 참된 메시지를 갖는 다는 것을 직접 계시한 것입니다.

 

이 네 비유는 왕국말씀과 관련 있는 세상에 흩어져있는 기독교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이 신약성경의 중심메시지는 1세기 동안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가르쳐졌습니다. 하지만 거짓 메시지의 가르침이 변개시켰습니다. 기독교 그 자체가 비정상적으로 자랐습니다. 이 비정상적인 성장은 결국 거짓교사들이 그들의 거짓 가르침을 통해 그들 스스로를 하락시켰습니다.

 

하락은 이 시점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누룩의 일은 계속되었고, 이 거짓 메시지가 모든 기독교에 속속들이 스며들 때까지 계속되었고, 계속될 것입니다. 원문에 의하면 이 하락의 과정은 모두가 누룩으로 부패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견지에서 문제를 생각해 보면 누룩의 일의 끝은 무엇입니까? 제도가 끝에 가까워짐으로 오늘날 교회를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대답은 확인하기 쉽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왕국말씀과 관계있는 것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듣고 이해하고 보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근본적인 왕국말씀을 언급하지 않는 교회는 이미 누룩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어떤 사람은 공허하게 들을 것입니다. 누룩의 마지막 일터에서 발효시키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과 다가오고 있는 왕국을 둘러싸고 있는 성경적인 참된 메시지는 오늘날 기독교 전역에 실제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부패시키는 과정은 한이 없고, 장애물이 없습니다. 근본적인 기독교 그 자체가 누룩으로 속속히 물들었고, 부패되어 가는 것이 왕국말씀과 관계있으며, 개혁파 기독교와 같음을 압니다. 신학교, 교회의 설교단, 그리고 성도들의 자리까지 모든 기독교가 마태복음 13장에 있는 처음 4비유에서 계시된 것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다 똑같은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근본주의자들은 부패하는 과정의 참된 본질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들을 이 부패로부터 벗어난 자들로 여깁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사람들은 전혀 그런 경우가 아닙니다. 왕국말씀에 대해 이해하고 선포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정통파 무리들은 개혁파 무리들과 같은 상태라는 것을 스스로 알 것입니다. 그들은 부패시키는 누룩을 통해 계속해서 스며들었다고 알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두 무리 사이에는 전혀 다른 점이 없습니다. 왕국 말씀에 대한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선포하지 않습니다.

 

근본주의 파와 개혁주의 파의 신학교는 모든 것으로 학생들을 훈련시키지만 한 가지 메시지는 자신들의 이해로만 성경을 연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학교들은 왕국말씀에 대한 완전히 빈 메시지로 교회의 설교단을 채우는 졸업생들을 배출하고 있습니다. 이 신학교 졸업생들은 중요한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모든 사역은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주님께서 돌보도록 맡기신 여러 무리들은 합당하게 양육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그들의 사역 아래에 있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천천히 기아선상으로 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 곳곳에 있는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메시지보다도 그들이 들어야하는 한 가지 메시지를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마태복음 13장에 있는 처음 네 비유에 주어졌습니다. 거의 2,000년 넘게 이어지는 누룩의 일은 기독교 곳곳에 확장되어 있는 부패를 산출했습니다. 이 누룩의 일은 왕국말씀을 둘러싸고 있는 메시지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이 부패의 결과로서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의 가까이에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사람들은 이 땅의 신학교에서 훈련받지 않았지만 왕국말씀을 이해하고, 종종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많은 사람들 보다 성경의 모든 것을 더 꽉 붙잡는 사람들입니다. 왕국말씀을 이해하는 사람은 성경의 열쇠를 소유합니다. 그는 성경 안으로 들어가 새 것과 옛 것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왜 왕국말씀일까?

왜 사람의 이해하도록 성경을 여는데 있어 왕국말씀의 가르침일까요? 사람이 성경에 대해 올바르고 합당하게 붙잡는다면 이 메시지에 대해 이해를 할까요? 그 대답은 두 가지 측면에 있다고 여겨집니다.

 

첫째로 왕국말씀에 대한 이해는 그리스도인 생활을 위한 목적을 둘러싸고 있는 참된 성경적인 그림을 제공합니다. 하나님은 왜 그리스도 안에새 창조를 가져오셨습니까? 하나님은 왜 이방인들 가운데서 사역을 하도록 모든 제도를 얻으시고 계신가요? 왜 오늘날 성령님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사역을 수행하시려고 세상에 계시나요?

 

둘째로 이것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방향을 제공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새 창조와 관련 있는 모든 것이 무엇을 목표로 향하고 있습니까? 무엇에 관해 영적전쟁을 합니까? 무엇에 관해 믿음의 경주를 합니까? 영적전쟁이나 믿음의 경주와 관련 있는 승리나 패배의 결과가 무엇일까요?

 

왕국말씀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게 그리스도인 생활을 둘러싸고 있는 질문이 답입니다. 이것이 유일한 것은 올바른 방식으로 완전한 성경적인 그림을 표현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에서 나온 것만이 그리스도인 생활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합당하게 다룰 수 있습니다. 또 이 가르침에서 나온 것만이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생활을 위한 참된 동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모든 것이 참되다면 왜 이 메시지가 오늘날 그리스도인 무리에 반대하여 그렇게 싸웠을까요? 그것은 거절이 표준이 되기보다 오히려 받아들임이 표준이 되는 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것이 전체적인 경우는 아닙니다. 오히려 거절이 변함없이 표준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마태복음 13:33절에 있는 누룩의 일에서 볼 수 있습니다. 왕국말씀을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부정적인 태도는 거의 2,000년 동안 지속되어 온 사탄의 일의 결말입니다.

 

1) ~에 대한 목적

신약성경에 있는 왕국말씀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은 복음서에서 이스라엘에게 하늘들의 왕국에 대해 제안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은 이 제안을 퇴짜를 놓았습니다. 이 제안은 이스라엘에게서 버려졌습니다. 이스라엘이 거절로 완전히 새로운 독립체가 수령인으로서 세워졌습니다(21:33~43, 벧전 2:9~11). “그리스도 안에 있는새 창조, 한 새 사람(고후 5:17, 2:15)은 이스라엘이 실패했던 곳에서 열매를 맺도록 세워졌습니다.

 

이스라엘이 이 제안을 퇴짜한 후에 하나님은 이 한 새 사람과 관계있는 이방인들에게 돌리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분께서 완전히 새 창조로 사역을 수행하시고, 완료하실 최후 2,000년을 따로 떼어 놓으셨습니다. 이것은 이방인들 가운데서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한 백성을 취해 내심으로 이루실 것이지만 현재의 시대에도 은혜의 선택에 의해 남은 자들(믿는 유대인들)”이 있을 것입니다(15:14, 11:5).

 

새 창조를 둘러싸고 있는 그분의 목적을 다루시기 위해 하나님은 세상으로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현 제도 곳곳에서 하나님의 영은 창세기 24장에서 볼 수 있는 사역을 수행하시기 위해 세상에 계십니다.

 

창세기 24장에서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의 신부를 획득하기 위해 먼 나라로 자신의 종을 보낸 것처럼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의 신부를 획득하시려고 세상으로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예표와 실제에서처럼 찾음은 가족들 가운데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영은 한 새 사람을 구성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분의 찾음을 진행하고 계십니다. 이 한 새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신부는 그 몸으로부터 택함 받습니다(2:21~25, 24:2~4, 9, 22:14).

 

또한 예표에서처럼 찾음이 완료된 후 신부는 옮겨질 것입니다. 리브가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옮겨진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부는 땅에서 옮겨질 것입니다. 이삭이 리브가를 만나러 나아갔던 것처럼 아들 또한 자신의 신부를 만나러 나오실 것입니다. 리브가가 이삭의 집으로 이삭과 함께 가서 그이 아내가 되었던 것처럼 신부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집으로 가서 그분의 아내가 될 것입니다(24:61~67, 살전 4:16~17, 19:7~9).

 

2) ~의 방향

그리스도 안에 있는새 창조와 관련된 모든 것을 향한 목표는 목표가 창세기 2장의 시작에서 정해진 것과 똑같습니다. 모든 것의 앞을 향해 움직이는 것은 다가오고 있는 땅의 안식입니다. 이 안식은 회복적인 사역의 6일에 이어진 창세기 2:1~3절에 있는 안식으로 전조(前兆)되었습니다(1:2b~25).

 

한 새 사람이 세워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제도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세상에 보내진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들의 움직이는 것이 항상 같은 곳을 향해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방향은 항상 같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시작되어 세워졌던 것이 중요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1:1~2:3).

 

영적전쟁의 합당한 이해와 오늘날 믿음의 경주가 앞으로 경영되지 않은 목표를 둘러싸고 있는 합당하게 이해하는 것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새 사람을 세우신 이유와 하나님께서 이 새 사람을 다루시려고 온 제도를 따로 떼어 두신 이유와 하나님께서 이 제도 동안 사역을 수행하시려고 세상으로 그분의 영을 보내신 이유를 합당하게 이해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들에 있는 힘 있는 영을 대항하여 전쟁하느라 바쁩니다. 그들이 바빠하는 믿음의 경주가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전쟁과 경주에 관한 여러 가지 것들을 이해하든 안하든 사탄은 이 모든 것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탄은 전쟁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패하게 하거나 경주에서 곁길로 가도록 언제나 숨어서 기다립니다. 결국 승리하거나 패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전쟁과 경주에서 이기거나 이기게 될 것입니다.

 

승리나 패퇴의 성패에 달려있는 가장 큰 것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구속된 사람을 위해 계획하실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인들의 이해와 한 가지 중심적인 사실로 그리스도인들의 집중시키시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여는 세상에 계십니다. 그들은 그분의 왕국에서 그리스도와 공동상속자, 통치자의 위치를 제안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부가 되어 왕후로서 아들과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사탄이 제도 초기부터 마태복음 13장에 있는 처음 4비유에서 서술된 것들을 이루려고 시작했다는 사실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탄은 그리스도인들과 왕국이 다가옴을 둘러싸고 있는 참된 메시지를 멸하고, 부패시키려고 그의 힘을 다 쏟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창세기에서 마태복음을 거쳐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지는 왕국말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몇 가지는 마태복음 13장을 연구할 때 계속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처음 네 비유는 집 밖의 해변가에 의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만 세 비유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집에 들어가신 후에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종종 간과합니다. 사람들이 이 비유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상당한 수준 이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연대표는 이 비유에서 오늘날 제도의 시작으로부터 미래의 메시야왕국까지 볼 수 있게 됩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첫 번째 네 비유는 왕국말씀과 관계있는 기독교의 역사가 나타나 있습니다. 이 역사는 이 제도 전체를 덮고 있습니다. 기독교에 있는 상태를 이해하는 것은 그런 상태들이 오늘날에도 존재하는 것처럼 사람이 역사 안으로 돌아가야 하고, 오늘날 존재하는 상태로 바뀌어 가는 사건들이 이어져야 합니다.

 

이런 방식에 따라 역사 안으로 돌아가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방법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교회사를 사람의 계시로 쓰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문제에 관해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하시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직 성경으로 갈 수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이 쓰는 모든 교회사는 교회사가 이런 측면과 관련되어 있는 한 세속적인 것으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단순하게 사람이 쓴 교회사는 성경이 다루는 중요한 핵심주제에 있다고는 하지만 교회사를 다루지 않습니다.

 

교회사초기는 사도행전에서 다루었습니다. 교회가 시작되고 난 바로 직후에 시작되었습니다. 이 기간은 이스라엘에게 왕국이 다시 제안되었을 때입니다(기원후 33~62). 따라서 메시지는 제안된 왕국에 중점을 둔 사도행전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서신서는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 같은 메시지를 중심으로 다룹니다. 그 메시지들은 왕국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서신서들은 단순히 그 같은 중심적인 메시지로 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가르침입니다. 사도행전처럼 이 서신서들은 초대 교회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은 1세기의 교회만을 다룹니다. 제도의 교회사를 다루는 성경은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입니다. 교회가 세워지기 전의 교회사는 마태복음 13장에 있는 비유에 있습니다. 제도가 지난 후 하늘들에 있는 심판대에서 다루어진 또 하나는 요한계시록 2~3장에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교회사는 제도가 시작될 때 주어졌지만 제도 동안의 교회사와 관계가 있습니다. 제도가 시작하기 전의 완전한 교회사를 성경에서 볼 수 있고(13:1~58), 제도가 끝난 후의 교회사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2:1~3:22).

 

마태복음 13장에는 제도가 시작하기 전 교회사입니다. 왕국말씀과 관계있는 부분으로 처음 네 비유 부분입니다. 왕국말씀과 관계있는 제도 이후의 교회사인 요한계시록은 일곱 교회에 보내진 일곱 편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왕국말씀과 관계있는 교회사를 비유를 사용하여 나타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왕국말씀과 관계있는 교회사를 아시아에 존재하는 일곱 교회에게 보내어진 편지를 사용하여 나타냅니다. 하지만 둘 다 똑같은 것입니다. 교회는 한 가지 방법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13:32, 2:2~3). 하지만 교회는 또 다른 방법으로 끝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13:32~33, 3:15~17). 다시 말해 겨자 싹으로 시작해서 완전히 부패된 존재로, 춥지도 덥지도 않고,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그리고 벌거벗은 존재로 끝나는 것이 교회사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분의 본래의 구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의 비유와 요한계시록 2~3장에 있는 일곱 서신은 하나님께서 창세기 초반부에서 그분의 계시로 구성되었습니다. 이것은 후자의 안식과 불가분하게 전자와 연결되었다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성경은 안식 곧 6일 동안의 회복적인 사역 다음의 전체가 기본적인 뼈대로 시작합니다. 6일 동안의 회복은 타락한 창조물의 회복입니다. 사람이 이 사역의 결론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안식의 일곱 번째 날은 이 회복 사역에 이어졌고, 이날이 곧 안식일입니다. 앞서 말한 것은 뼈대를 넘어 성경 전체 이야기와 관련 있습니다.

 

사람은 타락했습니다. 이 타락을 통해 사람은 몰락한 창조물이 되었습니다. 그 자신의 하락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다시 한 번 회복된 창조물도 하락을 가져오는 타락이었습니다. 이 하락에 이어서 하나님은 다시 회복적인 사역을 6일 동안 수행하셨습니다. 6일은 사람과 모든 창조물과 관계있었던 기간입니다. 이 후자의 회복사역은 안식의 날, 일곱 번째 날이 이어졌습니다. 이 일곱 번째 날, 안식의 날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기다리는 날이요, 다가오는 메시야 시대입니다(4:4~9). 이런 패턴은 처음에 시작한 패턴과 똑같은 것입니다.

 

이전 회복의 하루의 길이는 안식일을 포함해 24시간이었습니다. 나중 회복의 하루는 안식일 포함해 1,000년이 될 것입니다(16:28~17:5, 벧후 1:16~18, 3:1~8).

 

창세기 2:3절 이후의 모든 성경은 기본적인 뼈대에 달려있고, 이 뼈대에 추가적인 것이 덧붙여집니다. 사람이 처음에 시작한 뼈대를 다루고 있든, 그 다음의 성경을 다루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모든 회복사역은 같은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목표는 바로 다가오는 안식의 날입니다.

 

창세기 2장의 초반부에 있는 일곱으로 된 구조는 요한복음 2장에서도 똑같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요한복음 2장이 신약성경 시작하는 복음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은 창세기와 유사하게 시작하는 부분입니다.

마찬가지로 일곱 번째 날을 향해 움직이는 모든 것에 대한 문제는 두 책 모두 같은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이것은 주로 예표를 사용함으로 이루어졌고, 요한복음에서 이것은 주로 표적을 사용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창세기는 6일 동안 일어나는 타락된 창조물들의 회복과 관계가 있고, 이어서 안식의 날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6,000년 동안 일어나는 또 다른 타락된 창조, 타락한 사람의 회복과 관계가 있고, 이어서 7,000년째에 시작되는 안식의 시대가 시작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마태복음 13장에 있는 첫 번째 네 비유에 기록되었습니다. 이런 비유의 일들은 해석상 2,000년 동안 일어나고 있고 온 현 제도에 덮여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안식 바로 직전에 일어날 것입니다.

 

나머지 3가지의 비유에서 보이는 사건들은 현 제도가 지나서 일어나게 되고, 메시야 시대로 전진하게 됩니다. 이 모든 비유들은 같은 목표를 향해 움직인다는 것을 보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처음 같은 목표는 성경 처음에 제시되었고, 또 다가오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이 목표를 향해 움직입니다.

 

이 같은 것은 요한계시록 2~3장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어진 일곱 서신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연속되는 이 서신은 단순히 안식 직전 2,000년 동안 일어나는 또 다른 측면의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에서 계시된 것과 마찬가지로 이기는 자들에 대한 약속들은 왕국말씀과 다가오는 안식과 관련된 교회와 관계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습니다. 또 모든 것은 이 목표를 향해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다가오는 왕국과 관계있고, 그것에 중점을 두는 교회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약성경에 있는 어떤 것을 보는 단순한 문제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이 메시지에서 완전히 분리되는 역사책을 쓸 수 있지만 성경은 완전히 이 메시지를 둘러싸고 계시된 교회사에 중점을 둡니다.

 

1세기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왕국말씀이 땅의 모든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가르쳤던 것 때문에 성경과 일치되는 교회사를 이해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상태는 완전하게 뒤바뀌었습니다. 거의 2,000년 넘게 누룩의 사역 때문에 왕국말씀을 둘러싸고 있는 메시지는 두 가지의 것이 분명하게 타락되었습니다.

 

첫째로 교회 역사가는 우선 왕국말씀에 관해 그의 기록하는 것을 알지 못했고, 하물며 이 메시지를 그의 기록의 중심이 되게 하지 못했습니다.

둘째로 교회 역사가가 그 문제에 관해 썼을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그가 쓰고 있었던 것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거의 2,000년 넘게 진행된 누룩의 일 때문에 왕국말씀에 관한 진리는 완전히 맞지 않도록 타락시켰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연구와 존재했던 교회사를 연구하기 좋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또한 우리는 공중의 새들이 자유롭게 땅 속에 깊이 뿌리를 뻗은 나무의 나뭇가지에 깃드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는 누룩이 완전하게 그 일을 거의 완료했음을 말하고 우리는 그 곳에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왕국말씀에 대한 경고

마태복음 13장에 있는 비유들은 긍정적인 것을 다루기보다는 부정적인 것을 훨씬 더 넓게 다룹니다. 첫 비유가 열매 맺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기보다 열매 맺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더 주어진 공간입니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그리고 일곱 번째 비유에서도 강조하는 것은 이 같은 사탄의 일의 다른 측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관계있는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비유들만이 예외적입니다. 이 비유들은 땅과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부와 관계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들의 중심적인 요지는 긍정적이기 보다는 훨씬 더 부정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이 비유들은 왕국말씀과 관련 있는 제도 도처에 사탄의 일을 중심적으로 폭로하고 있는 것과 관계있습니다.

 

제도가 끝에 가까워지고, 타락하는 사탄의 일로 마무리 단계가 접어들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모든 문제가 거의 완전히 인식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는 이해하고 알기 쉽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부패된 상태는 누룩으로 악영향을 받은 자들에게 보게 됩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뒤로하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과 같습니다. 사실 그들은 그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이 육체가 되셨고, 구약성경이 인격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성경을 합당하게 인정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빵을 떼신 후에야 그들의 눈이 열리고, 성경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부패한 기독교를 보고도 그 기독교의 참된 상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성경적인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참된 상태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성경이 그 문제에 관해 계시하는 것에 대한 그들의 이해 부족에서 비롯됩니다. 그들의 눈이 기존 진리로 열린다면 이와 같은 것은 그들에게 제시되고, 그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말씀의 진리를 통해서만 일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현 제도에서 이런 것들이 일어날까요? 다가오는 왕국에 관한 진리가 이런 문제 속에서 선포될까요?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받아들여질까요?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눈을 열도록 할까요?

 

여기저기서 그 메시지를 듣고 이해할 것입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교회는 아닙니다. 나중에는 상태가 계속 악화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은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누룩을 넣어 두었을 때 빠져들었습니다. 모든 가루가 부풀 때까지 계속해서 악화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