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메시지에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신성한 속성들을 계속할 것입니다. 성경은 세 가지로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영이시오(요 4:24), 그분은 사랑이시오(요일 4:8), 또 그분은 빛이시라(요일 1:5)고 말합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영이시오, 본성에 있어 하나님은 사랑이시오, 경영에 있어서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사랑과 빛이 되시는 하나님은 그영이 되시는 그분 자신으로 사랑과 빛을 입증하십니다. 영으로서의 하나님이 존재하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사랑과 빛으로서 존재하실 수 없으십니다. 이는 그영의 부재로 연적인 모든 실재가 나타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전적으로 영 안에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믿는 이들로서 우리는 그영으로 주님을 만져야 하고, 그영으로서 주님을 체험해야 하고, 그영으로서 주님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는 영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입니다(고전 6:17). 주님에 대한 우리의 체험은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영이시기 때문에 그영과 완전히 완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영이 없는 사랑은 이론이 되고, 그영이 없는 빛은 교리가 됩니다. 그영이 여기에 있을 때 사랑과 빛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본질의 하나님이시오, 빛은 경영의 하나님이심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요, 빛은 하나님의 경영이시기에 사랑과 빛은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영 안에 있는지는 이 두 속성들로 결정됩니다. 여러분은 사랑 안에 있습니까? 빛 안에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속성 그영을 만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만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심이 그영의 오심이요, 그영이 오실 때 사랑이 존재하고, 우리가 이 사랑 안에 거하므로 우리는 빛으로서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사랑 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경영의 빛을 체험할 수 있음
생명 안에서, 사랑 안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도달하심은 빛을 가져오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도달할 때 여러분은 그영 안에 있는 사랑에 도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도달하실 때 우리는 그영 안에 있는 빛을 체험합니다.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도록 이끕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사랑 안에 거할 때 여러분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랑 안에 거할 때 하나님께서 움직이시기 시작하십니다. 이 때 우리가 보게 되는 하나님의 움직이심은 무엇입니까? 빛입니다. 빛이 하나님의 경영이요, 움직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과 의 우리 생활에서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빛으로 하나님을 체험하는 우리는 우리를 강권하는 사랑으로 하나님을 허락해야 함
여러분의 그리스도인 생활의 건강은 여러분의 사랑을 누리는 능력과 관계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동되어 주님 앞에서 울어 본적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강한 의지로 주님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주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울어 본적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분만을 갈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영이신 이 신성한 인격을 만졌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영이신 이 신성한 인격을 만질 때 이 사랑의 속성이 여러분의 체험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체험이 더 풍성하고, 더 건강함은 그리스도에 대한 여러분의 추구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빛으로만 주님을 따르고, 사랑으로 그분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국 쓰러질 것이고, 세상에서 다른 것을 추구하러 돌아갈 것입니다.
빛으로서의 하나님은 우리의 전진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시고 활력을 주심
사랑 없이 여러분은 빛이 두려운 것이기에 빛의 체험을 지속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사랑만을 체험한다면 합당치 못하게 될 것이요, 증가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그리스도인 생활을 지원할 사랑이 필요합니다. 또 여러분은 여러분의 그리스도인 생활을 조절할 빛이 필요합니다. 빛이 여러분을 조절하고 여러분의 경영(움직임)을 위해 여러분을 가르칠 동안 사랑은 여러분을 존재케 하고, 계속해서 강함을 여러분에게 제공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빛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아마 여러분의 그리스도인 생활은 아직 시작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면 구원 그 자체가 빛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여러분은 빛을 보았고, 구주 예수를 보고, 여러분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구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이 빛은 한번 구원받은 우리에게 비추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새롭게 된 후 여러분의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여러분의 성장과 전진은 빛으로서의 하나님의 빛 비춤 때문입니다.
빛으로서의 하나님의 움직이심은 구약성경에서 그려짐
창조 안에서
하나님은 빛 안에서 움직이십니다. 하나님은 빛 비추심으로 그분의 적극적인 사역을 수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서 하나님은 “사랑이 있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거기엔 사랑을 받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움직이기 시작하셨을 때 그분은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3). 빛은 하나님의 창조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부르심 안에서
사람과의 교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사역은 빛 안에서 수행되어진 어떤 것이었습니다. 스테반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의 하나님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행 7:2). 아브라함이 모든 것을 버리게 할 수 있었던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무엇입니까? 빛으로 하나님을 소개하는 나타나심입니다. 그 빛 비춤 때문에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랐습니다. 그 나타나심은 아브라함을 변화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빛 비추심으로 여러분에게 나타나신 후 여러분은 달라집니다. 주님 앞에서 여러분의 생활은 여러분이 빛을 얼마나 많이 누리는지와 훨씬 더 관계가 있습니다. 사랑은 여러분을 만족시키고, 격려를 하지만 사랑은 움직이도록 여러분에게 활력을 주지 못합니다.
여러분을 부르는 것은 빛입니다. 여러분이 빛에 의해 만져졌을 때 여러분은 “주님, 저는 당신에게 저의 생명을 드리기 원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빛 비추실 때 여러분은 일어날 정도로 강해집니다.
사랑은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드리는 여러분이 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여러분 자신을 헌신하기를 갈망하는 여러분이 되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빛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실제로 일어서서 헌신하는 여러분이 되게 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전히 여러분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모든 믿는 성도들은 예수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소수만이 그분의 부르심에 의해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사랑으로 주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믿는 성도들은 빛으로서 충분하게 주님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경영과 행정 안에서
빛이 왔을 때 하나님의 창조가 시작되었습니다. 빛이 왔을 때 하나님의 부르심이 시작되었습니다. 빛이 왔을 때 하나님의 경영과 행정은 시작되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주요한 것들은 빛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창조, 그분의 부르심, 시나이 산에서 율법을 주심은 천둥과 번개 그리고 그분의 나타나심으로 수행되었습니다.
빛의 임재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순서대로 나타납니다. 빛이 있기 전 모든 것은 혼돈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빛이 있을 때 모든 것은 딱딱 들어맞습니다. 빛과 함께 있는 것들은 더 분명한 차이를 보일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일들은 하나님의 움직이심 안에 계신 그분이 빛이시기 때문에 질서정연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빛은 우주가 구성된 주된 요소요, 질서 안에서 우주가 아름다운 이유입니다. 빛이 없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창조하신 것을 체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필요한 것을 배열하셨지만 빛 없이는 여러분은 볼 수도 없고, 그분께서 행하신 것에 감사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어두움에 있을 때 우리는 불평하고, 비난하고, 조소하는 대신 불안해하게 됩니다. 하지만 빛이 왔을 때 모든 것은 분명해지고, 옳은 이해를 갖게 되고, 심지어 하나님의 배열하심 안에 우리를 두심으로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그리스도인 삶 안에서 묻어나는 여러분의 모든 발자취가 빛에 빚지고 있습니다. 빛이 오면,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습니다. 빛이 오면, 여러분은 따릅니다. 빛이 오면 여러분과 여러분의 상황은 달라집니다. 빛이 올 때 여러분의 생명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게 될 수 있습니다. 더욱이 빛이 올 때 하나님의 경영과 행정이 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경영과 행정을 대표합니다. 율법에 제사장 같은 섬김과 하나님의 모든 규례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빛의 문제입니다. 빛 없이 하나님은 그분의 경영과 행정을 수행하실 길이 없으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지 않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성도들은 빛 비춤으로 자신들을 이끄시는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놀라운 것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빛으로서 하나님의 움직이심은 신약성경에서 말해짐
빛은 생명의 빛으로 체현(體現)됨
우리가 신약성경으로 올 때 빛은 사람으로 체현되었습니다(요 1:1). 이제 빛은 생명의 빛으로 불립니다(요 1:4). 이 생명의 빛은 하나님의 경륜으로 채워져 옵니다. 신약성경에서 빛의 문제는 하나님의 물질적인 창조, 땅에 속한 인류에 대한 부르심, 표면적인 행정과 경영의 세우심보다 훨씬 더 높은 것에 적용됩니다.
빛이 신약성경에서 처음 언급되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위한 생명의 어떤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서 우리는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 1:1)는 성경구절을 읽었습니다. 이것은 처음에 하나님의 경륜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후 하나님의 경륜은 신선하게 되었습니다. 이 체현이신 하나님의 경륜은 생명이 되셨고,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 되었습니다. 이 빛은 생명의 빛이 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여러분이 생명을 누릴 때 이 빛과 함께 함께합니다.
빛이 올 때 여러분은 단순한 이끌림을 받고,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경영과 행정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에서 빛이 올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의해 내면적으로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예수를 통해 채워졌고, 나타났고, 수행되었습니다. 그분 자신은 빛이시지만 단순한 빛이 아니요, 생명의 빛이십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생명의 빛은 이해시키고, 분별하게 함
생명의 빛이 왔을 때 이해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판단이 끝났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있는 죄 있는 여자를 봅시다. 그녀는 간음을 행하다가 붙잡혔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여자의 죄의 대가는 돌팔매로 죽는 것이었습니다.
죄를 물으려 했던 사람들은 예수를 함정에 몰아넣으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옳다. 그녀를 돌로 쳐 죽이라.”는 말로 반응하셨다면 그들은 “그러면 당신은 어떤 구세주인가?”라고 말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아니다. 돌을 던지지 마라.”라고 말씀하셨다면 그들은 “우리는 당신이 율법을 범했기 때문에 당신을 돌로 쳐 죽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주님을 비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이 이곳에 와서 주님과 마주쳤을 때 주님은 허리를 숙이고 바닥에 무엇인가를 적기 시작하셨습니다. 가련한 죄인은 그녀와 그녀의 처벌 사이에 혼자 서 계신 예수님으로 떨고 있었습니다.
모든 제자들은 자신들이 주님과 함께 붙잡혀 죽게 되었다고 느끼고 땀을 흘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만이 평안해 하셨습니다. 그분은 무엇인가를 쓰시려고 숙이시고, 순간적으로 통과할 지혜를 발휘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그녀에게 돌을 던지라.”(요 8:7)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에 빛이 있었다는 것을 압니다.
어떤 죄들은 다른 것만큼 심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바리새인이었다면 나는 이것에 관해 예수님과 논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 주님은 “맞다. 그녀가 간음을 했다. 하지만 다윗의 죄를 보라. 왜 너는 다윗의 시신을 꺼내 돌을 던지지 않는가? 솔로몬은 3,000명과 결혼했다. 너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반박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예수였다면 나는 그들의 논쟁에 초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 예수님은 논쟁을 벌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행동이 정상적이지 않았기에 더 이상 그분과 언쟁을 벌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단순히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그녀에게 돌을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바리새인들은 돌을 집고서 “맞다. 내가 죄가 있다. 하지만 저 여자와 같지 않다. 저 여자는 죽을죄를 지었다.”고 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 상황을 끄셨습니다. 그분의 임재 안에서 분별된 모든 사람들은 빛이 있었습니다.
생명의 빛은 단지 드러나게 하는 것만이 아니고 마음을 매혹되게 함
가끔 여러분은 어떤 불공평함에 관해 주님과 논쟁을 합니다. 나는 나의 삶 속에서 불공편한 많은 상황과 환경을 체험했습니다. 특히 내가 주님을 따르기 시작했을 때 말입니다. 수없이 나는 “주님, 그것이 불공평합니다.”라고 항의했었습니다. 이렇게 말을 했을 때 주님은 “맞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좋아한다. 네가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세상으로 가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어떤 이유인지 여러분은 주님과 논쟁하는데 여러분의 마음을 빼앗깁니다. 주님께서 “네가 공평치 않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너는 떠날 수 있다.”고 말씀하실 때 여러분은 결국 주님께 애원하는 처지가 됩니다. “주님, 저를 계속 당신의 품에 있게 하옵소서. 당신 안에서 죽기를 원합니다. 저를 주의 영으로 회복시키소서.” 이렇게 하도록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빛입니다. 빛의 임재 안에서 여러분의 논쟁은 끝납니다. 빛의 임재 안에서 여러분의 방어력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주님, 모든 사람이 옳습니다. 저만 잘못입니다. 저만 합당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게 되고, 또 그렇게 느끼게 됩니다. 빛은 드러나게도 하고 매혹시키고, 끌어들입니다.
빛은 반응하게 하고 변화시킴
결국 주님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누가 너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 여자는 “아무도 비난하는 자들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나도 너를 비난하지 않노라. 가라. 그리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이 올 때 강함이 오고, 변화가 옵니다. 주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를 따르는 누구든지 어두움에서 생활하지 않을 것이요, 생명의 빛 안에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빛을 비추시는 주님으로 모든 사람들이 반응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분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들은 아마 세상에 빛을 비추시는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주님께서 구하신 여자도 주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다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요,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다고 해서 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택함을 받는 자들이 절실하게 필요할 때입니다.
하지만 반응을 하는 자들은 생명의 빛을 가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랑이 되시고, 빛이 되시는 주의 긍휼에 관해 깨닫는다면 여러분은 주님께 “주님, 당신이 영이시고, 사랑이시고, 빛이시라는 것에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주님은 긍휼을 가지고 계십니다. 주호촌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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