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신성한 속성들로 가득한 생명

4장 구약성경에서는 우리가 빛으로서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것을 봄

Hernhut 2014. 3. 3. 20:05

 

 

하나님의 창조, 아브라함을 부르심, 시나이 산에서 율법을 주신 것은 모두 하나님에 대한 정의 중 하나로 빛이 포함되었습니다(요일 1:4). 하나님께서 움직이실 때 하나님은 빛으로서 오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창조, 부르심, 그리고 행정 안에서 빛으로 움직이신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여러분이 오늘날 그리스도인 생활을 영적으로 구약성경에 적용시키며 합당하게 잘 자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빛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부족한 것이 무엇이든지 우리를 위해 창조하심

여러분이 깨달아야 할 것 중 가장 우선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 여러분을 위해 여전히 창조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창조는 빛에서 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빛 비춤 아래에 있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증가하도록 여러분의 상황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와 같은 지식이 있다면 여러분은 조롱과 불평에서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또 여러분은 하나님의 움직이심에 대해 감동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빛이신 하나님은 그분의 부르심에 반응하도록 우리에게 활력을 주심

두 번째로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드러내심을 갖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스데반은 하나님께서 갈대아우르에서 약속의 땅으로 부르셨을 때 영광의 하나님으로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내신 것을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영광이 오고, 빛이 올 때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게 됩니다. 우리는 영광의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 계속 살 필요가 있습니다.

 

 

빛으로서의 하나님은 그분의 행정과 경영 아래로 우리를 데려오심

셋째로 빛의 도움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행정과 경영 안으로 와야 합니다. 시나이 산에서 하나님의 빛 비추심에 대한 표현은 하나님께서 빛과 천둥소리를 드러내심으로 진지함과 경고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명령을 통해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어느 정도 베일이 벗으셨습니다. 그분의 신성한 행정과 경영 안에서 그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오, 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빛 비춤을 받는 우리는 우리가 그분의 행정과 경영을 가벼이 만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 안에서 하나님은 생명의 빛으로 오심

 

하나님의 경륜은 생명으로 수행되고, 이 생명은 빛으로 깨닫게 됨

신약에서 우리는 빛으로서 주의 오심에 대한 두 단계가 있음을 봅니다. 빛으로서 우리에게 주님의 오심은 하나님의 움직이심입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은 성육신을 통해 오셨고, 그분 안에서 빛이 되셨고, 또 이 빛은 이제 사람들의 빛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경륜)은 육신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가 되신 것입니다(1:1,14). 하나님의 이 경륜(말씀)은 생명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 생명은 이 생명이 사람에게 오도록 하기 위해서 빛으로 전해져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생명으로 오기 전에 사람들에게 빛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이 이 생명의 빛 비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생명 그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성육신 되실 수 있으시고, 사람이 되실 수 있으시고, 생명이 되실 수 있으시고, 모든 것이 되실 수 있으시지만 빛 없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서 또 다른 영역 안에 떨어져 계신 분이시오, 어떤 것이 되십니다.

 

빛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사역하시고, 사람이 하나님을 보게 하는 매개체입니다. 생명이 빛을 가진 후로 하나님의 경륜(말씀)은 실행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우리의 영적인 모든 체험들, 하나님의 경륜을 위한 우리의 체험들은 결국 이 빛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은 요한복음 8장에서 깨닫게 됨

다시 한 번 요한복음 8장을 보려고 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죄를 범한 여자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여자를 예수 그리스도께 데려와 이제 모세는 율법에서 이러한 자를 돌로 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거니와 선생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빛과 같이 움직이셨습니다. 그들과 논쟁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는 논쟁으로 그들을 절대 판단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의해 판단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자에게 돌을 던지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빛이 되셨고, 빛으로서 그분이 그들에게 빛 비추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몸을 숙이시고 바닥에다가 어떤 것을 쓰시기 시작했을 때 그분은 빛으로 자신을 확대시키신 것입니다.

 

그들이 열을 내고, 화를 내었을지라도 그분 곁에 서있는 모든 사람들은 어떠한 것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었지만 적어도 그들은 자신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나는 이런 죄를 범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죄가 내 안에도 있구나.”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 내가 죄인이구나. 나는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사람이야.”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빛 비춤 때문에 그들이 그 자리에서 떠났습니다.

 

후에 주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8: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전 구절들은 판단의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따르는 문제에 관한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빛 안에서 이끌려져 주님을 따르게 됨

빛이 올 때 속성이 있습니다. 빛 안에 있는 사람은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추구하지 않으면 그는 빛이 부족합니다. 빛이 올 때 여러분은 추구합니다. 빛 안에 있는 사람은 추구하는 자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내가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누구든지.....”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빛이 올 때 여러분은 영적인 것들을 합당한 이해를 갖게 될 뿐만 아니라 주님을 따를 것입니다.

 

빛에 대한 체험은 변화를 산출함

우리는 얼마나 좋은 모임을 갖고 있는지를 주변에서 듣지만 많은 성도들이 여러 해를 이러한 모임에 익숙해져 있고 계속해서 이런 모임으로 모이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감명을 주는 말 대신에 나는 내가 이렇게 변화되었다.”라는 말을 할 수 있기 소망합니다. 많은 성도들은 교회생활에 있어 사회적인 측면을 위해 모임에 옵니다. 그들은 예수 외에 교회생활에서 어떠한 것들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예수를 추구하고, 그리스도를 누리고, 그리스도를 생활하기보다 어떤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훈련받고, 유익을 얻기 위해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빛 안에 있는 사람은 주님께 이끌려지고 주님을 추구합니다. 우리가 빛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이끌림 받은 사람들이라면 이 빛의 어떤 비춤이 증거, 기도, 말씀읽기, 교제로부터 올 때 그것은 우리에게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과 함께 오는 빛을 영접할 수 없다면 우리는 메시지를 얼마나 누렸는지,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를 계속해서 계산할 것입니다.

 

빛을 제외한 생명의 움직임은 제한됨

생명이 빛이 될 수 없을 때 하나님과의 우리의 교제는 가두어집니다. 하나님과의 우리의 교제는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명으로 예수를 영접했지만 이 생명의 전달요소는 빛입니다. 이 생명의 실제적이고 움직이는 영향력은 그 빛 비춤을 통해 옵니다. 어쩌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메시지를 얼마나 누렸는지를 우리에게 말할 때 그 메시지가 당신을 변화시켰습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내가 깊이 감동을 받는 대신 깊이 변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빛이 온 것을 압니다. 빛은 생명의 움직임을 산출합니다. 빛이 얼마나 강하게 움직이는지와 관계없이 우리가 그 빛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생명은 우리 안에서 움직일 수 있는 것을 바로 제한받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과 교회생활은 생명의 빛의 영향 아래에 있습니다.

 

 

빛은 하나님의 경륜(말씀) 안에서 우리의 움직임을 통제함

 

12시간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말씀) 안에서 우리가 수고하기에 충분한 시간임을 가리킴

예수님은 낮에 열두 시간이 있지 아니하냐? 사람이 만일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걸려 넘어지지 아니하되”(11:9), “낮일 때에 내가 반드시 나를 보내신 분의 일들을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면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9: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한 나라에서 12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경륜(말씀) 안에서의 완전함을 말합니다. 이것이 새 예루살렘이 12문이 있고, 성벽에는 12기초가 있고, 다른 차원의 12보석이 박혀 있는 이유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살고 있고, 영원한 나라에 살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일하는데 12시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 압박하신 이유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경륜(말씀)의 영원한 어떤 것을 수행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빛은 낮과 관계가 있는 어떤 것입니다. 그래서 빛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말씀) 안에서 어떤 것을 수행하여 우리의 수고가 이루어지게 하는데 충분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시간을 낭비하기 때문에 충분하지 않다고 느낌

우리가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과 낭비하려는 생각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가 우리의 시간을 주님께서 우리에 대해 측량하시지 않으시는 어리석은 것에 낭비하는 것이 사실인데도 나는 너무 바빠 하나님께서 내게 헌신하신 것을 돌아볼 시간이 없어.”라고 말하곤 합니다. 빛이 올 때 여러분은 항상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원하신 경륜(말씀) 안에서 여러분에게 명하신 것을 수행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주셨음을 알게 됩니다.

 

빛은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여러분의 움직임을 통제합니다. 그러므로 낮 동안 여러분이 수고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문제가 생깁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것을 다른 목적을 위해 을 쓴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문제가 생깁니다. “주님, 저는 낮 12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낮에 저는 주님께서 제게 정해주신 일을 위해 12시간을 사용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경륜)을 수행하고, 당신이 설계하신 교회를 건축하고, 당신의 몸 안에 있는 성도들을 보양을 하고 소중히 여기는데 이 시간을 사용할 것입니다.”라고 말하기를 배우십시오.

 

주님께서 새 예루살렘을 건축하는데 충분한 시간을 우리에게 주셨지만 여러분이 빛을 보물처럼 여겨야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온 존재를 빛 안에서 살 때 통제를 받을 것이요, 우리가 합당하게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빛은 하나님의 증인을 산출하기 위해 움직임

 

 

우리는 우리의 제한된 개인적인 환경이 아니라 협력하시는 하나님의 증인의 지체로 빛 비춰졌음

교회시대에 믿는 이들은 언덕 위에 있는 도시가 숨겨질 수 없는 세상의 빛입니다(5:14~15). 주님은 사람(혹은 주님 자신)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등()을 두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등잔(燈盞) 위에 계시며 여러분을 비추셨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빛 비춤을 받았을 때 여러분은 반()되만 빛 비춤 받기를 좋아합니다. ()되는 양을 측정하는데 거의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a: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내가 큰 빛입니다.” b: “어디에 있죠?” a: “회사에서 일을 합니다.”라고 대화를 합니다. 이것이 반()되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빛은 협력의 증거를 위해 등잔(燈盞) 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각 개인이 빛으로서 독립적으로 빛 비추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빛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그분께서 이미 협력하시는 그분의 증인이 있었음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우리 개인의 상황에 둔 개인적인 빛들로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협력하여 빛 비추는 등잔의 일부로서 그리스도를 확대합니다. 주님은 확대되는 우리에 의해 확대되십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분의 등잔(燈盞)의 일부로서 빛 비추는 전문가로 우리를 산출하실 때부터 우리는 다른 환경 아래에서 움직이고, 빛 비춤으로 달려가기 시작한다는 것을 우리가 파악하기에 어려운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우리 이웃, 직장, 학교에 있는 사람들로서 얼마나 인상 깊게 빛 비출 수 있는지는 상관없지만 주님께서 추구하시는 것은 협력하는 증인입니다.

 

 

부활 안에서 빛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의 지식을 묘사함

빛에게 명령하사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주셨느니라.”(고후 4:6)

 

우리 마음 안에 하나님의 빛 비추심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얼굴을 알게 하는 것

우리의 모든 것은 어두움 안에 있습니다. 어둠에서 하나님은 빛이 있으라.” 말씀하셨고, 빛은 우리 마음 안에 비추러 왔습니다. 베일이 사라졌지만 베일이 사라진 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의 영광의 지식이 오는 것이지만 여러분이 이 지식을 만질 때 여러분은 예수님의 얼굴을 반사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은 우리 양심을 더한 우리의 영입니다. 사실상 이것은 한 움직임입니다. 영의 직관의 움직임을 위해 더 많은 기회를 만들어 내는 우리의 영의 직관(直觀)은 교제에서 오고, 교제는 선한 양심에서 옵니다. 여러분은 이 세 가지(직관, 교제, 선한 양심)을 귀와 눈처럼 말할 수 없는데 이것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하나의 독립체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역은 직관(直觀)에서 시작합니다. 이런 방식 안에서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자신과 더 교제하는 것을 갈망하도록 하셔서 작동시키십니다. 교제에서 선한 양심이 산출됩니다. 이 양심은 여러분의 마음에 영향을 주고,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의 마음이 어떤 것을 생각하게 되면 이런 생각을 하지 마라.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지 마라.”라며 여러분의 양심은 여러분을 통제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인격은 선한 양심에 따라 삽니다. 영적인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이런 방식 안에서 통제되는 사람입니다. 인격이 자신의 영향, 교제, 그리고 양심을 통해 주의 움직임에 의해 통제되는 사람은 영적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어떤 것을 가져 오셔서 사역하시기 원하십니다. 그분의 사역하심은 빛으로서 비추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둠에서 빛이 비추실 것이라”(고후 4:6)고 말씀하신 그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이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칠흑 같은 어둠이었음을 가리킵니다. 이 어둠은 바깥에서 구름이 낄 때 여러분이 체험하는 그런 어둠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빛 비추시고, 빛이 비쳤을 때 우리 마음에 비춘 것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그 빛 비춤으로 살게 하고 우리의 인격을 이끌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후 우리는 어느 정도 영적인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 빛 비춤은 우리 안에 무엇을 산출했을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의 얼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지식을 드러내고, 비추고, 맑혀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어둠 안에 있었지만 하나님은 빛이 있으라하시고 빛은 우리 마음 안으로 빛 비춤이 왔습니다. 베일은 벗겨졌습니다. 하지만 베일이 벗겨진 후 이해를 할 수 없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지식은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우리에게 반사되어 왔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여러분의 교제가 관계있기 때문에 이 특별한 구절에 부담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여러분의 교제는 감각이나 느낌을 넘어 어떤 것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둠에 있었지만 결국 그리스도의 얼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 비춤을 받기위해 빛으로 나왔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주님께서 어떤 분처럼 보이는가?”라고 물었다면 여러분이 이 빛 비춤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답할 수 있겠습니까? 이 빛이 우리 마음에 비춰짐은 모든 어둠이 사라지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지식을 확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이 지식은 예수의 인격과 예수의 얼굴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갈망은 우리가 예수와 함께 교제를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리나 감각의 예수와 교제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우리 마음 안에 하나님의 빛 비추심을 통해 알려지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서 어둠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예수의 얼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지식을 가져오시는 것을 확장시키시는 예수를 체험해야 합니다.

 

 

주호촌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