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디모데전서에 있는 영원한 생명
영원한 생명은 교회생활의 요소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믿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했습니다(딤전 1:15~16). 우리는 우리가 구원 받을 때에 이 생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이 생명을 받아들임으로서 우리는 이 영원한 생명을 붙잡아야 합니다(딤전 6:12).
이것은 우리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래를 위한 보물로 좋은 토대를 우리 자신을 위해 따로 떼어 놓음으로서 우리는 생명이었던 것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딤전 6:19). 이것이 우리의 변화가 될 것입니다. 믿는 이들로서 우리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는 영원한 생명과 전체적으로 관련돼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 아직 창조되지 않은 생명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직 창조되지 않은 생명입니다. 하나님은 자존자(自存者)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긍정적인 것을 만들어낼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께는 제한이 없으십니다. 마가렛 배버 부인은 “당신은 풍성하신 나의 하나님, 당신은 내가 부족한 것이 무엇이든 나를 위해 채우실 수 있네.”라고 노랫말을 썼습니다. 하나님은 채우실 수 없는 것이 없으십니다. 그분은 모든 풍성이십니다. 여기서 “당신은 내가 부족한 것이 무엇이든 나를 위해 채우실 수 있네.”말하기 때문에 베버 부인은 훨씬 더 심오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람의 생명 안에는 필요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창조하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아직 창조되지 않은 생명을 우리를 위해 창조하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부족함을 위해 나의 아내를 또 아내의 부족함을 위해 나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천을 위해 주호촌이라는 젊은 형제를 창조하셨고, 인천의 필요를 채우도록 특별한 상황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창조되지 않은 이 생명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 창조자 하나님은 이와 같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은 창조되시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과 함께 있는 곳에는 우리의 공급들을 포함하여 무엇이나 만들어 낼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만지고, 생명 안에 있고, 생명 안에서 주님과 함께 있는 자일 때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들을 채우시고, 창조하시고, 우리를 위해 개입하실 수 있으십니다(롬 8:32).
영원한 생명: 자존(自存)과 영존(永存)
생명은 자존(自存)과 영존(永存)이 있습니다. 자존(自存)은 이 생명이 그 자신의 미덕과 능력에 의하여 존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존(永存)은 이 생명이 결코 패하고 멸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 생명이 자존(自存)과 영존(永存)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이 생명을 이기거나 통제할 수 없습니다.
이 생명은 패배할 수 없고, 항복을 할 수 없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은 날 그분은 우리에게 오셨고, 우리는 우리 영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영 안에 있는 이 생명은 무엇입니까? 이 생명은 바로 그 자존(自存)하시고 영존(永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이 생명을 이기려고 하는 것과 상관없이 이 생명이 패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생활이 정말 놀라운 이유입니다.
여러분이 이 생명을 굶겨 죽이려고 해도 죽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잊었을 때 그분은 여러분이 예상하지 못할 때 어떤 것이 자연스럽게 여러분에게 흐르도록 하기 위해 우리 안에 어떤 것을 불어넣어 일으키십니다.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이 생명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이것은 이 생명이 우리와 연합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우리는 더욱 이 생명에 대해 알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이 생명으로 논쟁을 하거나 시험하려고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그들 안에 있는 이 생명에 대한 경영을 무시할 때 더 걱정이 됩니다.
많은 믿는 이들은 그들 안에서 생명의 성장을 무시함
가끔 여러분의 마음이 다른 것들로 채워졌을 때 여러분 안에서 계속해서 자라고 있는 이 자존(自存) 생명을 무시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생명이 여러분에게 한 느낌을 주는데 여러분의 마음이 굳어져 있다면 여러분은 이 생명이 주는 느낌에 대해 반응이 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존(自存) 생명이 끝날 것이라거나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오래 지난 후에 이 자존(自存) 생명이 여전히 일할 수 있습니다. 때론 우리 중 어떤 사람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처럼 보이지 않고 타락하는 약한 믿음을 갖은 자가 될까봐 심히 염려합니다.
그는 그의 구원을 잃었습니까? 이러한 생각을 하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계시는지 질문하기도 하고, 기도했을 때 실수를 했는지 말하기도 하고, 실제로 믿음을 갖고 있는지도 묻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이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영원한 생명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생명으로서 누군가의 영 안으로 들어가실 때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이 생명을 쫓아내지 않을 것입니다. 이 생명을 영접한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할지라도 하나님은 흔들리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존(自存)과 영존(永存)이십니다. 어느 날 하나님은 그분께서 계신 곳에서 그 사람을 기억하실 것이고, 그 사람은 깨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을 갈급하게 해 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굶으려고 한다면 물 없이는 3일, 음식 없이는 7일 후에 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해 동안 여러분이 주를 먹이기를 거절한다고 해도 그분께서 자존(自存)과 영존(永存)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해를 입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데 왜 내가 그렇게 할 경우 약해질까요?”라고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은 여러분이 필요한 것을 창조하십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긍휼이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여러분은 약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 무한한 생명
하나님 자신이신 이 생명은 또한 무한합니다. 하나님께서 무한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분을 억제하는 방법을 알지도 못하고, 가둘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분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기에 무한하십니다.
이 온 우주 가운데 하나님 외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태양도 늙어가고 있습니다. 지구 또한 늙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왜 안식년이 시행되었는지 아십니까? 땅을 다시 새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6년 동안 농사를 지은 후 1년은 농사를 짓지 않고 그냥 놀리는 안식년을 시행합니다.
여러분은 땅이 1년 동안 쉬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환경이 나빠진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땅이 쉬게 하는 대신 아주 많은 화학비료를 사용합니다. 우리는 법을 피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휴식이 필요합니다.
동역자들이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심신을 재충전하고 난 후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은 안식의 원칙을 따른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여러분에게 여러 번 말해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떤 휴식도 필요 없으시고, 휴식하시지도 않으십니다. 여러분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안식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낮잠을 주무셨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나는 말지 못합니다.
영원하신 분으로서 하나님은 영원히 신선하시고 전혀 낡지 않으심
“영원”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희미하게 알고 있는 것 때문에 우리의 이해가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새 집이 낡게 되고, 젊은이가 늙고, 아주 신선하고, 아름다운 것들도 금방 낡고, 변해버립니다. 나는 골동품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더 새로운 것, 낡지 않은 것을 더 좋아합니다. 나는 나이 든 사람들도 좋아 하지만 젊은이들을 더 좋아합니다. 나이 든 형제자매들은 골동품과 같습니다. 나는 낡아지는 것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 들어갑니다. 나도 나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영원하시고 항상 신선하신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에 항상 젊으시고, 신선하십니다. 여러분이 이 영원하신 분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늙는다고 느낀다면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하나님을 부족하게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면 영원함은 늙지 않고, 쇠퇴하지 않고,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조 전 하나님은 그분으로서 계셨고, 창조 후 하나님은 여전히 그분으로서 계십니다.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하나님께서 과정을 통과하셨나요?”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경륜을 위해 과정을 통과 하셨지만 그것은 그분과 다른 분이 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들 하나님은 선재(先在)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창조되었을 때 우리는 그분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아들 하나님은 영원 안에서 존재하십니다. 그분은 변함없이 영원 안에서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구속을 위해서 과정을 통과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 자신은 결코 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왜냐면 그분은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영원하신 분으로서 하나님은 편재(遍在)하신 분이시오, 전지(全知)하신 분이심
영원하신 분으로서 하나님은 전지(全知)하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편재(遍在)하십니다. 그분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분은 제한을 받지 않으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인천에 계시고, 뉴욕에도 계십니다. 서울에도, 북경에도, 런던에도, 아주 작은 마을 헤른후트에도 계십니다. 그분이 계시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영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끝내지 못합니다. 그분은 시간 안에서 우리를 부르러 우리 안에 나타나셨지만 그분 자신은 영원 안에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시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였고 하나님은 우리를 다루십니다. 시간 안에서 우리는 모든 과정을 통과합니다. 결과적으로 시간 안에서 우리는 “주님, 우리가 영광의 면류관을 받았음으로 당신께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은 너희가 체험한 것이다. 그것은 나와 함께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것을 항상 아십니다.
우리 모든 문제들과 관계하고 있는 것에 하나님의 전지(全知)하심과 편재(遍在)하심 때문에 하나님은 “내가 안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창세기가 끝날 무렵 야곱이 요셉에게 말한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십니까?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자신의 두 아들에게 축복하고 있었을 때 아버지 야곱이 하고 있었던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하는 일을 제지했습니다. 그리했을 때 야곱은 “나도 안다. 아들아, 나도 안다.”고 했습니다. 나는 이 말씀을 좋아합니다. “나도 안다.” 이 말씀은 우리 예수께서 항상 내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께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실 수 있나요? 아시나요?”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나도 항상 이렇게 묻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나도 안다. 얘야.”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왜 이런 일이 벌어지죠?”라고 부르짖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에도 하나님의 대답은 “나도 안다.”입니다.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한 번 만지면 제한받지 않는 요소이기 때문에 특히 여러분은 영원한 생명 안에 있는 것입니다. 제한받지 않음으로 영원하고 편재(遍在)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만질 때 여러분은 여기에 계시는 분을 만지는 것이고, 하시는 분을 만지는 것입니다. 심지어 여러분은 하나님을 떠나려고 할 수도 있지만 여러분이 도망하려고 하는 곳이 어디든지 하나님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네가 가는 곳이 어디든 나는 거기에 있다. 네가 나를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기 원한다면 너는 집에 머물든지, 예배당에 가든지, 성도들을 만날 수 있다. 네가 어디에 있든지 어디로 도망을 하든지 하나님은 마찬가지로 거기에 계십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편재(遍在)하시고 전지(全知)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모든 것을 아십니다. 영세 전에도 계셨고, 과학이 발전해 첨단을 걷는 아마득한 미래에도 계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영원한 생명으로서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된 쉼을 주심
여러분은 여러분이 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쉼을 가져야 합니다. “주여,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리이까? 혹은 내가 주의 앞을 떠나 어디로 피하리이까?”(시 139:7) 우리는 하나님을 찾으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이미 거기에 계시기 때문이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려고 할 필요 역시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도망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 관한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이든 만드시는 방법을 아십니다. 우리가 소유한 영원한 생명은 이처럼 놀라우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오늘날 영원한 생명을 완전히 소유하는 날까지 붙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 생명은 아직 창조되지 않은 생명이요, 자존(自尊)생명이요, 영존(永存)생명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은 영원성을 가진 제한받지 않는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편재(遍在)하시고, 전지(全知)하신 분의 생명입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오, 어디에나 계신 분이십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생명을 한 번 소유함으로 쉼을 갖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붙잡는 것은 교리가 아닙니다. 이 생명은 신학적인 것이 아닙니다. 격려조차도 아닙니다. 이 생명은 사실이요, 실제요, 진리입니다. 여러분 안에 이와 같은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이 생명은 창조되지 않았고, 자존(自尊)생명이요, 영존(永存)생명이요, 무한한 생명입니다.
그리고 이 무한한 생명 안에는 영원이라고 불리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무한한 생명 안에서 편재(遍在)하신 분과 전지(全知)하신 분을 가집니다. 그분은 항상 여러분이 있는 곳에 계시고, 모든 것을 아십니다. 심지어 여러분의 부적절한 행동에도 하나님은 거기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에도 여러분과 함께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이 부당한 행동을 할 때 하나님은 “이 악하고 무례한 사람아!”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에 계십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이러하신 구세주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까? 이분이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이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영원한 생명이신 그분을 예배하고 찬양합니다.
우리는 그 모든 속성을 가진 이 영원한 생명을 붙잡아야 함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붙잡아야 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영원한 생명 안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후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붙잡음으로 선한 싸움을 싸웁니다. 결국 그날에 우리는 진정 생명을 알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러분이 그분을 체험하고, 누리는 법을 알지 못한다면 여전히 여러분에게 교리적인 것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주께 찬양하십시오. 나는 하나님께서 여기에 항상 계심을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아신다는 것도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가장 좋은 분이심을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이든 만드실 수 있으신 분이심을 감사합니다.
사실상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붙잡은 것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성한 속성들은 인간의 미덕들을 만들어 낸다. 이 영원한 생명은 신성한 속성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신성한 속성들과 사람의 미덕들이 다른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신성한 속성들은 사람의 미덕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사람의 미덕들은 신성한 속성들과 동일합니다. 미덕이 있는 사람이 되는 길은 무엇입니까? 영원한 생명에 신성한 속성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영적인 사람이어도 여러분이 이 신성한 속성들에서 떠나 있을 때 여러분의 생명은 미덕 있는 생명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디모데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하고, 붙잡아야 한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모든 미덕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붙잡을 때 여러분은 이 모든 신성한 속성들을 누리게 되고 정상적인 사람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에 있는 모든 것은 신성한 속성들을 누림에서 나와야함
여러분은 여러분의 모든 생활이 신성한 속성들을 누리는 것과 참여하는 것에서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의 생활은 신성한 속성들을 받아들이고, 신성한 속성들로 담대해 져야합니다. 여러분의 날마다의 생활에서 여러분은 이러한 속성으로 제한받아야 하고, 움직여야 합니다. 여러분의 달란트, 능력, 가능성, 총명함, 선명함, 학력 중 계산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들을 극복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쓰임 받는 사람은 신성한 속성들로 가득한 사람입니다. 이 속성들은 여러분 안에서 경영되어야 합니다. 이 신성한 속성들은 여러분을 통해 살아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삶은 여러분이 미덕의 사람이 되는 근거입니다. 우리 모든 체험은 주의 속성으로 흠뻑 적셔드는 것입니다.By 주호촌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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