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Hernhut yh. Sung
모든 무리는 영향력 있게 기능을 발휘하도록 하기 위해서 지도자들이 필요합니다. K리그 선수가 한 팀의 일부가 될 때 그는 팀 지도자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각지교회의 일부가 되어야 하고 또 그 교회 지도자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A. 각 장로는 그들이 임명된 곳의 회중을 감독한다.
각 회중의 성숙한 자를 자신들의 장로로 임명해야 합니다(딛 1:5). 장로들은 “너희 가운데 있는 무리(단수)”를 돌보고 감독합니다(벧전 5:2~3). 이 “무리”는 각지교회입니다. 그것은 각 교회가 자신의 장로들을 갖기 때문입니다. 현대교회의 장로들과 목사들을 세우는 것과 다릅니다. 현대교회는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시험을 치르고 해야 목사가 되고 그들이 추천해 장로들을 교단에서 임명하지만 성경적인 방법은 각지교회에서 임명합니다. 장로들의 관할권은 현실적으로 각지요, 그들을 임명한 각지교회에 분명하게 제한되었습니다(행 20:17, 28). 감독이 자신의 양떼를 돌보는 것처럼 장로들은 각지교회에 있는 자들의 혼생명의 유익을 돌아봅니다(히 13:17).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혼생명을 돌아보는 이와 같은 사람들을 갖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자격을 갖춘 장로들이 없을 때에 자매들은 여전히 형제들의 지도자에게 복종해야 합니다(딤전 2:11~12, 고전 14:34~35). 하지만 현대의 교파주의는 자매들이 형제들을 가르치고 권면하려고 합니다. 이 또한 비성경적인 문제입니다. 이끄는 자들의 부담은 각지 무리의 지체들에게만 연장됩니다.
B. 지체들은 영적인 지도자의 유익을 갖도록 각지교회와 그들 자신들을 동화시켜야 한다.
모든 무리 안에 있는 지도자들은 감독할 책임이 있는 자들을 알아야 하고 따르는 자들은 따를 책임이 있는 자들을 알아야 합니다. 가정에서 남편은 자신의 아내의 머리입니다. 아내는 그녀 자신의 남편에게 복종합니다. 이것은 서로에게 계약과 헌신을 요구합니다(엡 5:22~24). 마찬가지로 부모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권위를 갖고 있고, 자녀들은 자신의 부모에게 복종합니다. 각 가정에서 자녀가 부모에게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엡 6:1~4). 이와 같은 원칙은 그들의 시민들 위에 있는 시장, 고용인 위에 있는 고용주의 지도자에 적용됩니다. 그것이 모든 단체가 그 단체와의 제휴하고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어떤 방법을 가지고 있는 이유입니다. 이것은 회사나 나라와 어떤 도시에서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모든 지도자들은 이끌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하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따를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같은 것은 각지교회에서 적용된다.
장로들은 성령의 가르침을 따라서 그들이 있는 곳의 무리를 감독하고 “돌봅니다.” 장로들은 “그들 무리가운데서” 세워진 자들입니다(벧전 5:2). 이것은 지체들의 유익을 “돌볼 부담”을 포함하고(히 13:17), 특별하게 길을 잃고 헤매는 지체들을 거짓 교사들이 이끌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행 20:28~31). 마찬가지로 지체들은 자신들을 “다스리는 자들”에게 “순종과 복종”을 요구받고 명령받았습니다(히 13:17). 각 장로직분은 한 각지교회를 감독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무리의 일부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고, 각 그리스도인들은 따를 목자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각지교회들은 선한 지도자 직분이 필요합니다. 모든 지체들은 자신들의 혼생명을 돌보는 지도자들의 지지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지체들이 그들은 이끌고, 영적으로 돌볼 부담(책임)이 있는 그 지도자와 함께 모이고, 자신들이 따라야 하는 지도자를 알기 때문에 각지교회의 일부로서 자신들을 동화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축구 선수가 어떤 팀으로 가려고 하는 빅 리그를 상상해 보십시오. 선수가 어떤 팀으로 영입제의를 받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닙니다.” 선수들을 경영하는 것을 아는 매니저나 감독들이 없을 것이요, 매니저나 감독에게 들으려고 하는 선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팀이 있다 할지라도 팀과 감독, 그리고 선수가 기능을 잘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지체들이 각지교회와 동화되기를 거절하거나 회중에서 회중으로 “떠돌아다니며” 교회를 방문할 때 일어나는 문제와 똑같습니다. 각지교회의 지도자들은 어떻게 지체들을 감독할 수 있을까요? 지체들은 어떻게 효과적으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왜 어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특정한 각지교회의 지도자들과 동화되기를 원치 않을까요?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을 고집스레 거절한다면 이것은 혼생명을 돌보는 것과 하나님의 사람들의 영적감독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항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각지교회의 지도자들과 적극적으로 사역할 부담(책임)을 받아들였습니까? 오늘도 여러분이 고민해 봐야하는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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