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Hernhut yh. Sung
신약성경에 있는 각지교회는 그 회중의 일원으로서 인정되었고, 동화되었던 제자들로 구성되었습니다.
A. 지역에 있는 제자들은 각지교회와 호칭을 바꾸어 말할 수 있었다.
축구팀에 관해 말할 때 사람들은 무리를 말하는 것과 선수들을 말하는 용어를 바꾸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팀이 경기를 잘했다.”거나 “선수들이 경기를 잘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유나이티드 맨체스터가 게임을 이겼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선수들이 그 팀의 모든 일원이기 때문에 바꾸어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영감을 받은 형제들이 한 지역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불렀을 때 그들은 가끔 교회로 그들을 불렀습니다. 하지만 다른 때에 그들은 교회의 지체들로 형제들을 불렀습니다. 이러한 용어들은 모든 제자들이 각지교회의 지체들이 되었기 때문에 바꾸어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히 구별되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편지하노니.......*형제들아, 이제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다 같은 것을 말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판단으로 완전히 함께 결합하라.”(고전 1:2, 10)
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로 썼을 때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성한 자들이요, 성도로 불린 자들”로 말하고 있습니다. 10절에서 그는 “형제들”로 그들을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각지교회를 교회로 부르든, 형제들로 부르든, 성도들로 부르든 이것은 아무런 오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각지교회를 호칭하는 것은 그 지방에 있는 성도들, 형제들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사랑하는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너희를 택하셨음을 아노라.”(살전 1:1, 4)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교회에게 편지하노니.......*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로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하나니 이것이 마땅함은 너희의 믿음이 매우 많이 자라고 너희 각 사람이 서로에게 베푸는 사랑이 풍성하기 때문이라.”(살후 1:1, 3)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교회”라고 썼고, 4절에서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랑하는 형제들”로 그들을 불렀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에서도 같은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각지교회를 부르는 것은 그 지역에 있는 성도들을 부르는 것이요, 다른 지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은 모든 믿음 있는 제자들이 각지교회의 일부로서 인정되었고 동화되었다고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각지교회의 지체들이었던 믿음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각지교회의 지체들이 아니었던 그 지역에 있는 다른 믿음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빌립보에 있는 모든 성도들과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빌 1:1). “빌립보 사람들아, 이제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초기에 내가 마케도니아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일로 나와 교제한 교회가 너희 외에는 없었느니라.”(빌 4:15).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있는 모든 성도들과 감독들과 집사들”로 불렀고, 또 “나와 나눈 교회는 너희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분명히 바울은 여기서 교회로 그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의 경우와 이면적인 것입니다. 바울은 먼저 성도들로 그들을 부르지만 나중에는 교회로 그들을 부릅니다. 그러므로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은 빌립보에 있는 교회를 구성했습니다. 또 그것은 믿음이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각지교회의 지체가 되어야 한다고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것은 “빌립보에 있는 모든 성도들”로 기록된 것이 맞습니다. 그러므로 지역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각지교회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의 집에 있는 교회에게 문안하라. *이 서신을 너희 가운데서 읽은 뒤에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서신을 너희도 읽으라.”(골 4:15~16).
바울은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했습니다. 그런 후 “라오디게아의 교회”에 그 편지를 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것은 같은 무리들에 대한 바꾸어 말할 수 있는 표현들임이 분명합니다.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은 라오디게아에 있는 교회를 구성했습니다. 모든 “형제들”이 각지교회의 지체들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교회로서 해야 하는 사역을 논하는 편지요, 지체들이 각지교회의 사역에서 멀어지는 개인으로서 해야 하는 사역을 논하는 편지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 점은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이 각지교회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이해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과 반대의 경우 모두 각지교회로 부르고 있었고 불려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나는 또 다음과 같은 반론을 일으킬 수 있다는 염려가 생깁니다. “윗트니스 리의 지방교회를 따르는 무리가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가 그들의 “지방적이어야 한다.”는 주장만은 맞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교파적이지 않고 각지교회라면 한국 땅에 교회당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지방교회와 교파교회는 모두 같은 논리입니다. 지방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맞지만 그들에게도 선호적 오류가 있습니다. 교파교회도 교리적 논리에서 오류가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에게 오류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려고 합니다. 서로를 바라보지 말고 자신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방적인 입장을 취하고 많은 세월을 이어온 것을 칭찬할만한 것입니다. 또한 교파교회도 핵심적인 교리를 보호해온 것 역시 칭찬할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각자가 오류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서로 이단으로 몰아붙이는 현상입니다.
B. 특별한 제자들은 각지교회들의 지체들이었다.
“이제 안디옥에 있는 교회에 어떤 대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의 루기오와 사분영주(四奮殮主) 헤롯과 함께 양육을 받은 마나엔과 사울이라.”(행 13:1).
바울, 바나바, 그리고 다른 교사들은 “안디옥에 있는 교회”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사마리아와 같은 다른 교회들의 일부로 동일시되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므로 각 제자들은 특별한 각지교회의 일부인 것으로 간주해야 했거나 인정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가 행하는 행위들을 기억하리라. 그가 악한 말들로 우리를 헐뜯고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며 자기 자신도 형제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자들도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요삼1:10)
그곳에서 죄인 디오드레베는 영접되어야 했던 사람들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을 쫓아냈습니다. 디오드레베가 교회에서 형제들을 쫓아냈다면 그것은 형제들이 교회 안에 있는 형제들로서 당연히 인정되었다는 것이 됩니다. 과거 교회에도 이러한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 교회를 혼란케 했던 것을 현대교회에서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분과 그분의 왕좌 앞에 계신 일곱 영과.......*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 곧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필라델피아,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보내라, 하시더라.”(계 1:4, 11). “너는 앞으로 당할 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너희 중에서 몇 사람을 감옥에 던져 넣어 너희를 시험하리니 너희가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하리라. 너는 죽기까지 신실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왕관을 네게 주리라.......또 내가 사망으로 그녀의 자녀들을 죽이리니 그리하면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속 중심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리라. 또 내가 너희 행위에 따라 너희 각 사람에게 주리라.”(계2:10,23).
요한계시록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로 불렀습니다. 요한계시록 2, 3장은 예수님께서 각각의 교회들을 부르셨다는 것은 각지교회들이 서로 달랐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각 교회를 부르시는 것 같이 예수님은 지체들을 부르시고 계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8~9절에서 서머나에 있는 교회를 부르시지만 10절에서 마귀가 “너희의 몇”을 감옥으로 던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2:18~22절에는 두아디라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를 썼지만 23절에서 주님은 “내가 어희의 행위에 따라 너희 각 사람에게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1절에서는 사대에 있는 교회로 부르셨고 4절에서는 “사데에도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이름이 네게 있어 그들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걸으리니 이는 그들이 합당한 자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서머나에 있는 “너희의 몇”이라고 불렀을 때 예수님께서 두아디라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하시고 계셨나요? 예수님께서 두아디라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사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말씀하시고 계셨나요? 어떤 사람들은 각지교회를 세워야 하는 것으로 여겼고,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교회들을 세워야 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서머나에 있는 “너희 몇”은 두아디라에 있는 “너희 중 한 사람”들과 다른 제자들로 묘사했습니다. 하지만 각 그리스도인은 어떤 특정한 각지교회의 일부의 존재로서 인정되었고, 동질화되었습니다.
장로들과 각지교회 사이에 연관성에 대해 비교해 보십시오. 각 장로는 특정한 각지교회와의 일로 동화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임명하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자기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맡기고”(행 14:23). 그들은 “모든 교회에서” 장로들을 임명했습니다. 그러므로 각 교회의 장로들은 그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의 장로들을 부르니”(행 20:17). 바울은 밀레도에서 “교회로” 장로들을 부르기 위해 에베소교회로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장로들은 교회의 일부였습니다. 그들의 일은 각지교회와 관련되었습니다(행 20:28). 각 장로는 특정한 각지교회에 속해 있음으로서 동화되어 있었고 그 특정한 교회의 사역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 교회“의”나 교회 “안에”라는 말로 표현되었습니다(행 16:4, 약 5:14, 벧전 5:1~3).
마찬가지로 각 지체들은 특정한 각지교회와 동화되어야 합니다. “이제 안디옥에 있는 교회에 어떤 대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의 루기오와 사분영주(四奮殮主) 헤롯과 함께 양육을 받은 마나엔과 사울이라.”(행 13:1). 여기에 기록된 교사들은 안디옥에 있는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장로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섬겼던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각지교회 “안에” 있다는 것은 그 사역 안에서 활동적인 참여하는 존재요, 그 일부로서 동화되는 것을 입증합니다. 빌립보서 1:1절을 다시 보죠.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빌립보에 있는 모든 성도들과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빌 1:1). 바울이 빌립보에 있는 모든 성도들과 감독들과 집사들로 불렀다는 것에 주의하십시오. 하지만 감독들과 집사들은 특정한 각지교회와 함께 일함으로 동화되었습니다. 그들을 제외하고 기록되어 있는 성도들은 마찬가지로 “모든 성도들”이 특정한 각지교회와 함께 일함으로 동화되어야 함을 가리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다 함께 나를 따르는 자가 되고 또 너희가 우리를 본보기로 삼은 것같이 그렇게 걷는 자들을 눈여겨보라.”(빌 3:17). “너희는 내 안에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들을 행하라. 그리하면 화평의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빌 4:9). 우리는 이 형제들과 교회들의 본을 따라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위한 본입니다. 각 그리스도인들이 1세기에 있던 각지교회의 일부로서 동화될 예정이었다면 오늘날 왜 그와 같은 자들이 되지 못할까요? 그리스도인이 각지교회의 일부로서 계속해서 동화되는 것에 대해 거절할 성경적 권위가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그리스도인이 그 교회의 일부로서 인정되는 것을 심각하게 만들지 않는 동안 교회가 있는 지역에서 어떻게 계속적으로 합당하게 살 수 있을까요? 사람이 K리그 축구선수가 되려고 한 팀의 일부분이 되어야 하는 것과 대학생이 되기 위해서 특정한 대학에 입학허가를 받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각지교회의 일부로서 그들 자신들을 동화시켜야 합니다.
C. 제자들은 새로운 지방으로 옮겨갔을 때 그들은 거기 각지교회의 일부로서 인정되도록 조치를 취했다.
사울의 경우
“아나니야가 가서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안수하며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던 길에서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사 너로 하여금 시력을 받게 하시고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그가 곧 시력을 받게 되니라. 그가 일어나 침례를 받고 *음식을 받으매 강건해지니라. 그 뒤 사울이 다마스커스에 있는 제자들과 며칠을 지내며 *곧 여러 회당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거늘”(행 9:17~20). 사울은 다마스커스로 가던 길 위에서 예수님을 보고서 회심을 했습니다. 그는 “다마스커스에 있는 제자들(교회)”과 며칠을 보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생명의 위협을 가했을 때 도망했습니다(행 9:23~25). 계속 성경을 읽어 볼까요?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과 합류하려 하나 그들이 다 그를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된 것을 믿지 아니하되 *바나바가 그를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주를 본 것과 또 그분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과 다마스커스에서 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선포한 것을 밝히 말하니라.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그리스 말 하는 사람들을 논박하니라. 그러나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하매”(행 9:26~29). 사울이 예루살렘에 갔을 때 그는 거기서 “제자들에게 합류하여 한 형제”가 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각지교회의 일부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제자들은 바울의 과거 역사 때문에 그를 두려워했었습니다. 제자들은 바울이 진정으로 제자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바나바가 다마스커스에서 사울의 회심에 관해 설명했습니다. 회심 후 그가 오고가면서 “그들과 함께”있었고, 그들 가운데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위협이 그의 생명에 대항하게 되었을 때 그는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그때에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로 떠나서 *그를 만나매 안디옥으로 데려와 그들이 일 년 동안 그 교회와 함께 모임을 가지며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더니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5~26). “이제 안디옥에 있는 교회에 어떤 대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의 루기오와 사분영주(四奮殮主) 헤롯과 함께 양육을 받은 마나엔과 사울이라. *그들이 주를 섬기며 금식할 때에 성령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서 시킬 일을 위해 그들을 내게로 구별하라, 하시니 *이에 그들이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 13:1~3). 이후 바나바는 안디옥으로 보냈고 바나바는 사울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로 안디옥에 있는 교회에서 함께 사역했습니다. 다른 교사들과 함께 그들은 “안디옥에 있는 교회에” 있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먼저 사울은 다마스커스에 있는 교회의 일부였고 예루살렘으로 갔을 때 그는 거기에 제자들과 함께 하려고 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안디옥으로 옮겨갔고, 거기에 있는 “교회에” 머물렀습니다. 그가 거기로 간 곳에서 그는 그 지역에 있는 각지교회의 일부로 동화되었습니다.
(2) 사울은 각지회중의 일부로서 인정받으려고 앞장섰습니다. 그는 회중에서 회중으로 지속적으로 방문을 했거나 “떠돌아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는 “제자들로 가입하려고 했습니다.”
(3) “합하다. 가입하다.”는 “견고하게 붙이다. 함께 섞다. 연합하다. 단단하게 연결하다.”를 의미합니다(테일러의 바인). 그것은 강한 유대를 입증합니다. 사람들이 연루되어 있을 때 일반적으로 그것은 목적, 의도, 약속을 입증합니다(눅 15:15, 롬 12:9, 행 5:13, 17:34, 고전 6:17).
(4) 사울은 교회에서 활동적으로 사역하고 출석하려고 단단하게 마음먹었습니다. 인정받았다는 것은 그가 “오고가고 그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요, 가르침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5) 초기 교회에서 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의 회심을 의심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가 믿음 있는 제자인지 아닌지 조사할 권리를 가졌고, 그가 믿음이 없다면 그를 거절할 권리도 가졌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였지만 그는 결코 바울의 회심을 질문하는 교회의 권리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지체가 되려고 하는 어떤 사람을 자동적으로 받아들일 의무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증거가 사람이 죄의 증거가 없는 믿음 있는 제자라는 것을 가리킬 때 교회는 개인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바나바
“각지교회의 수많은 믿는 자들”은 필요를 지체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무리가 한 마음 한 혼이 되어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그들 중에 자기 소유를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말하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매 큰 은혜가 그들 모두에게 임하니라. *그들 가운데 부족한 자가 아무도 없었으니 이는 땅이나 집을 소유한 자들이 다 그것을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었음이더라. *키프러스 지방 출신의 요세라 하는 레위 사람이 있어 사도들이 그를 바나바라 하더니 (이것을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이라.) *그가 땅이 있으매 그것을 팔아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행 4:32~37). 바나바는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의 사역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지체들의 필요에 따라 돈을 나눠주는 사람이었고, 땅을 매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가 그를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주를 본 것과 또 그분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과 다마스커스에서 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선포한 것을 밝히 말하니라.”(행 9:27). 사울이 제자들이 되기를 원할 때 바나바는 여전히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의 사역을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이 일에 관한 소식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의 귀에 들어가매 그들이 바나바를 보내어 멀리 안디옥까지 가게 하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즐거워하며 모든 사람에게 권면하여 마음에 작정을 하고 주께 붙어 있으라 하니 *이는 바나바가 선한 사람이요, 성령님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기 때문이라. 이에 많은 사람들이 주께 더해지더라. *그때에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로 떠나서 *그를 만나매 안디옥으로 데려와 그들이 일 년 동안 그 교회와 함께 모임을 가지며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더니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2~26).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안디옥에 있는 새로운 교회로 바나바를 보냈습니다. 거기서 그는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교회와 함께 모였고, 그들을 격려했습니다. 그와 다른 교사들은 “안디옥에 있었던 교회”에 있었습니다(행 13:1~3). 그러므로 그가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을 때 바나바는 각지교회의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활동했습니다. 그가 안디옥으로 보내졌을 때에도 각지교회인 안디옥의 일부가 되었고, 그 교회의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아볼로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마음을 먹으므로 형제들이 편지를 써서 제자들에게 권면하여 그를 영접하라 하니라. 그가 거기에 이르러 은혜를 통하여 믿게 된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니 *이는 그가 성경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보여 주며 힘있게 유대인들을 확신시키되 공개적으로 그리하였음이더라.”(행 18:27~28). 아볼로는 에베소에서 진리를 배웠습니다.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려고 했을 때 에베소에 있는 교회는 그를 영접하는 곳의 형제들에게 권면하도록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런 후 그는 그들 가운데서 부지런히 일을 했고, 믿는 자들을 돕고 예수님을 공식적으로 가르쳤습니다.
결론
그리스도인이 한 지역에서 새로운 지역으로 옮겨갔을 때 그는 거기의 교회를 찾고, 그들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런 후 그 사역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1세기의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현대에 와서 교파주의 교회들로부터 이런 정상적인 교회 모습이 변질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의 지체들은 자신들의 마음에 들면 머물고, 들지 않으면 다른 교파로 다른 교회로 옮겨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습관처럼 되어 후세대들에게 유전하고 있습니다. 또 기억해야 할 것은 교회들이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에 관해 서로 교통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믿음 없는 어떤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절할 권리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교회가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 모든 사람을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있다면 편지가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요? “우리가 다시 우리 자신을 추천하기 시작하겠느냐? 혹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처럼 너희에게 추천하는 서신을 보내거나 너희로부터 추천하는 편지를 받을 필요가 있겠느냐?”(고후 3:1). 바울은 그가 고린도에 있는 교회로부터 보내거나 교회로 보내는 추천장이 필요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왜냐면 그가 이미 거기에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떤 사람들이 추천장을 보낼 필요가 있음을 말했습니다. 그는 추천장을 쓸 필요가 없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것들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새로운 지역과 알려지지 않은 교회로 옮길 때 교회는 지체들이 “칭찬받을 수 있는 자”인지를 알기 위해 교통할 모든 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파주의교회에 이런 권리를 가지고 있을까요? 아마도 거의 그런 권리를 상실했을 것입니다. 지체들이 옮겨가는 교회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는 한 무슨 목적이 이와 같은 편지 사역을 하게 할까요? 그들이 교회의 일부가 될 의도가 아니라면 그들은 편지가 필요치 않았을 것입니다(롬 16:1~2).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본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이 사는 지역에 있는 믿음 있는 각지회중의 일부가 되고 그들과 동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지역으로 옮길 때 그들은 그 지역의 믿음 있는 회중을 찾아야 하고, 그들의 일부로서 인정되어야 합니다. 아볼로는 그가 사역을 했던 교회로부터 보내어진 편지가 있었습니다. 사울은 개인적인 명성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특정한 방법은 구속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개인은 그가 각지교회의 일부로 간주되기를 원하는 어떤 방법으로 알려져야 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본을 닮을 것을 가르쳤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빌 3:17, 4:9). 어떤 상태에서 축구선수가 한 팀에서 다른 팀으로 옮겨가거나 학생이 한 개학에서 다른 대학으로 갈 수 있나요? 선수가 한 팀에 등록되어야 하고 학생이 한 대학에 등록절차를 받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믿음 있는 그리스도인은 한 각지교회에서 다른 각지교회로 옮길 수 있지만 그는 믿음 있는 각지교회의 일부가 되기 위해 자신을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편애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에 (행 10:34~35) 사람이 각지교회의 일부가 되는 것을 거절할 수 있다면 모두 거절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 각지교회의 일부가 되는 것을 거절된다면 어떻게 어떤 교회가 기능을 발휘할까요? 사람이 어떤 교회가 아닌 믿음 있는 각지교회와 동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의하십시오. 교회가 믿음 있는 그리스도인만을 받아들이는 것을 주의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믿음 있는 교회의 일부가 되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또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께 교회의 연결이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교회와의 우리의 연결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과의 우리의 연결을 섬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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