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에 있는 방언의 은사》
우리는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교회 안에 있는” 방언의 은사를 읽었습니다. 성령에 의해서 변화를 일으키시어 “그분의 뜻으로 모든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나누어 주시는” 은사 가운데 언급되어 있습니다(고전 12:7~12). 그러므로 주어지고 있는 이 은사나 주어지지 않은 은사는 신성한 지혜에 따라서 훈련되어진 온전히 신성한 뜻의 문제입니다.
이 은사는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시는 은사”의 목록에서 마지막에 언급됩니다(고전 12:27~28). 그리고 사도들의 질문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사도이겠는가? 다 선지자들이겠는가? 다 교사이겠는가? 다 기적을 행하는 자이겠는가? 다 병을 치료하는 은사를 가진 자들이겠는가? 다 방언들로 말하는 자이겠는가? 다 통역하는 자들이겠는가? 하고 묻습니다(고전 12:29~30). 이 질문은 그런 은사들을 소유하고 있는 성도들만이 아무런 의심 없이 확실하게 만듭니다. 사실 그 질문은 말다툼을 사람의 몸에는 많은 지체들이 있고 또 각 지체에는 그 지체 고유의 기능이 있으며, 모든 지체의 유익을 위해 발휘되도록 하는 것처럼 교회에도 각 지체마다 다른 은사들과 할당된 직무가 있어 하나이고 같은 몸에 속해있는 점을 고려하면 지체들이 무엇을 겪고 있든지 한 몸에 연결되어서 은사가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힘써서 주장할 바로 그 목적으로 물은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의 영감을 받은 주장에 따라 그것은 사람 몸의 모든 지체들이 말하는 능력을 가지고 방언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처럼 방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는 교회의 모든 지체들을 요구하는 것은 불합리할 만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은 예언의 은사가 방언을 갈망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예언의 은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어 교회의 덕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사역인데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헛된 것들을 드러내려고 할지 모르지만은 사랑은 세우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고전 8:1). 바울을 강한 대조를 이루게 하여 말합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방언을 하나 교회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많은 말을 하는 것보다 이해하고 들을 수 있는 말로 적게 하여 다른 성도들을 가르치는 것이 나은 것이라고 말합니다(고전 14:18~19). 그래서 이것의 상대적 가치는 5대10,000만큼입니다.
그런데 그는 고린도사람들에게 “이해하는 것에는 어린 아이들이 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방언의 은사를 그들에게 설명하는 것은 이사야 28:11~12절에 채워져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거절하는 것과 연결되는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하시겠다고 예언하십니다.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내가 이 백성에게 말하리니” 여기에 더듬는 입술, 다른 언어가 나옵니다. 이 방언은 믿지 않는 백성들에게 주는 “표적”이었습니다. 바울이 그 다음 구절을 설명하는 것은 심각한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지만 예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니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언의 은사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것입니다. 방언의 은사를 말한 다음에 성령을 받는 그런 은사를 얻은 믿는 자들에게 일어난 표적은 간단히 성경을 거꾸로 돌려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