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청년 시절에 예수님에 대해 알았고 그분 안에서 용서를 받는 축복을 받았다. 나는 교회당 내에서 봉사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한편으로는 내가 복음을 나누었던 사람들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매우 형편없었다.
공유하고 싶지 않은 것을 공유했다. 나는 무서웠다. 내가 잘못된 말을 해서 누군가를 외면하면 어떻게 될까? 그들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질문을 하면 어떡하지? 게다가 공유할 기회조차 없으면 어떡하지?
나는 천성적으로 내성적이었기 때문에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몇 년 후부터 하나님께서는 이 부분에서 제 마음을 깨닫게 하셨다.
한번은 친구들과 외출을 하다가 그 무리 중 한 명이 멈춰 서서 한 노숙자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 남자는 내가 바로 지나친 사람이었다. 그의 상호 작용은 나를 생각하게 했다. 어쩌면 생각보다 기회가 많았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나는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한 한 형제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온 각 사람은 요한복음을 나누어 주었다. 그 복음은 몇 달 동안 내 주머니에서 통째로 불태워졌다. 나는 단순히 그것을 버리는 방법을 알 수 없었다.
나는 하나님께 그분을 나누는 방법을 보여달라고 간구하고 그분이 보내신 말씀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전도지를 모으고, 비디오를 보고, 책을 읽었다. 나의 주위에 있는 잃어버린 자들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할수록, 그들의 구원에 대한 내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실제로 전도지를 나눠 주거나 대화를 시작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그리스도의 연모임을 시도하라는 계시를 받았다. 나는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그 결과는 처참했다. 얼마 후 완전히 낯선 사람들과 가질 수 있었던 놀라운 대화를 지켜보아야 했다.
그 일들을 돌이켜 보면, 내게 도움이 되었던 두 가지 중요한 진리가 있는데, 그 진리는 내가 계속 되짚어 보아야 할 것들이다. 첫 번째는 영원의 실재이다. 그중 한 가지 비유는 불타는 건물에 대한 비유다. 건물에 불이 났을 때, 나는 누군가를 방해하고 있는지, 내가 옳은 말을 했는지, 아니면 그들이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는지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건물에 불이 났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내 주변 사람들이 더 큰 위험에 처해 있다고 믿어야 한다. 한 유명한 무신론자는 ‘영원한 생명이 가능하다고 믿으면서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 사람을 얼마나 미워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두 번째 진리는 전도란 나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두려움과 긴장의 상당 부분은 내가 그것을 알아내거나 올바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에 온다. 그러나 전도는 메시지에 관한 것이지 메신저에 관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와 예수님과 나누는 기쁨을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면 시작하기를 기다리지 않기를 바란다! 전도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시는 큰 특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