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디게아에 있는 교회는 그들이 얼마나 가난한지를 알지 못하고 풍성하다고만 생각했기 때문에 꾸짖음을 받았다. 진리만으로 우리를 풍성케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진리를 아는 것이 우리를 영적이도록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분은 진리로 오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인격으로도 오셨다. 이것이 성육신의 원칙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격으로 구성된 진리를 가져야 한다. 진리는 그들의 인격으로 구성된 이들을 통해 신성한 사역을 하게 한다. 신약성경의 원칙은 말씀이 육체가 되신 것이다.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요 1:1)
말씀이 영원 안에 계셨지만, 말씀이 육체가 되셔야 했다. 말씀이 육체가 되시지 않았다면 그리스도는 구세주가 되실 수 없으셨다. 어느 날 말씀이 육체가 되셨다. 주 예수님 자신이 사람으로 오셨고, 사역하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셨다.
같은 방법으로 우리가 아는 진리 또한 육체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인격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진리가 육체 됨 없이 움직이거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진리가 움직이게 하는 것은 합당하게 구성된 인격이 필요하다. 우리가 진리만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인격은 그 진리와 어긋나 진리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진리는 육체(체질)를 요구한다. 문제는 우리가 아는 진리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대개 우리의 인격만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에게 질문해야 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내 안으로 얼마나 많이 구성되었는가?”
생명 노선에 있는 모든 이름은 우리에게 실제가 되어야 한다. 이 이름들 뒤에 있는 진리는 우리의 인격이 될 때까지 우리 안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그런 후에만 진리가 움직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창세기에 있는 이름을 연구하고 배우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께 말해야 한다.
“주님, 저는 자라길 갈망합니다. 저는 대가를 치르길 갈망합니다. 전 생명 노선에 있는 이 이름들 모두의 실제를 갖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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