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교회II

끝이 수단과 방법을 옳다하는가? / 우리가 선을 이루려고 악을 행할 것인가?

Hernhut 2014. 12. 28. 22:18

 

오늘날 개신교회가 생각해봐야 하는 것을 이번집회에서 말하려고 합니다. 이번집회는 참으로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메시지를 준비하면서 개신교회에 대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형제가 형제, 어찌됐든 교회가 부흥하면 괜찮은 일 아닌가? 우선 교회가 우선이야. 다른 교회에서 하는 것을 우리도 해 보세나. 그것이 세상적인 일은 아니지 않은가?”고 타협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우리가 자주 좋은 결과나 유익함이 되는 것이라고 믿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가능한 어떤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옳은 것입니까? 이런 생각이 상황 윤리도덕성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습니까? 성경은 성경 권위에 대한 순종에 관해 가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도덕, 예배, 교회조직, 교회사역에 어떻게 적용해야 합니까?

 

 

서론

바울은 거짓말로 가르친다고 비난 받았습니다. 선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악을 행하자”(3:8) 바울은 여기서 이 교리를 믿는 것을 부인했습니다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믿거나 마치 그들이 행하는 것처럼 판단합니다. 이 생각은 우리가 이루기를 소망하는 목표나 결과를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그 목표가 훌륭하고, 똑바르다면 우리는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갖은 수단과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 생각들은 몇 가지 이름으로 불립니다. “상황 윤리”, “도덕성”, “끝이 좋으면 다 좋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 “현실성그 외 다른 용어들로 쓰인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악의 도구를 사용한다.”라고 불렀다.

 

이번 공과의 목적은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생각에 관해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정부, 회사원, 기업인, 가족, 교육가, 그리고 교회지체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는데 이런 판단을 사용합니다. 특히 책, 프로그램, 그리고 영화 등에 조차도 연예인들에 의해 빈번하게 적용됩니다.

 

I. 순종은 수단과 결과를 포함한다.

 

바울은 우리가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 악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3:8). 바울을 비난 하는 사람들은 그를 중상모략을 했습니다.

 

성경은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 한다는 것을 뭐라 가르칠까요? 그 말이 옳다면 우리는 성경에서 가르친 그런 생각들을 찾을 수 있을까요? 어디에서 그렇게 가르쳤나요?

 

그런 생각을 갖는 문제는 하나님께서 행하도록 말씀하신 것과 다르게 행하도록 정당화시키는 한 가지 방법뿐입니다.

 

A. 많은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을 금했다.

우리는 인간의 교리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지 말아야 합니다(15:9, 13). 인간의 교리를 따른 실행들은 헛된 예배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교리는 하나님께서 심지 않으신 것을 심는 것이요, 뿌리째 뽑힐 것입니다.

 

하지만 교리가 하나님의 것과 다른 것이라면 그 교리는 결말이든 수단이든 인간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해야 할 일을 말씀하시고 우리가 다른 일을 행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을 사용하여 일을 하라고 하시지만 우리가 다른 방법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인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복음을 전파한다면 우리는 심판을 받습니다(1:8~9).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사용하도록 말씀하시는 것 외 다른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한다면 우리는 복음이 말하는 것과 다른 가르침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외의 목표를 추구한다 해도 다른 가르침을 추구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의 가르침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소유치 못합니다(요이 1:9). 아버지와 아들을 소유하려면 우리가 예수의 가르침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예수의 가르침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결과와 우리가 사용해야 할 수단을 명시한다면 다른 결과나 다른 수단을 추구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안에 거하는데 실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말하든지, 무슨 행동을 하든지 예수님의 권능을 힘입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3:17).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라는 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결과와 마찬가지로 수단을 포함합니다. 모든 것은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그분께서 교육하시는 것과 들어맞아야 합니다.

(딤후 3:16~17, 10:23, 14:12, 3:5~6, 22:18~19, 딤전 1:3, 딤후 1:13, 5:43)

 

B.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사용해야하는 수단을 명시하시기도 하시고, 명시하시지도 않으신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지, 파기시키셨는지를 예수님께 들었어야 했습니다(3:22~23). 하나님의 가르침이 목표에 대한 수단을 명시하실 때 우리는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을 바꿀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목표에 관한 것과 그 목표에 대한 수단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에 순종해야 합니다(28:2).

 

하나님께서 목표를 주시지만 수단들에 관해 인도하시지 않으신다면 도덕적으로 올바른 어떤 수단은 정당화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에 관한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일번적인 권위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방주를 지으라고 말씀하셨지만 나무를 베어 적절한 사이즈에 맞게 자르는 것에 대해 정확하게 명시하시지 않으셨습니다(6:14). 그래서 노아는 나무를 베어 사이즈에 맞게 자르는데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결과는 하나님께서 방법을 명시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방법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들이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사용해야 하는 방법을 명시하실 때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불순종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황윤리나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과 다른 어떤 행동을 하는 것으로 정당화해 어떤 훌륭한 목표를 추구하는데 사용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고퍼()나무로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셨습니다(6:14). 하나님은 결과(방주)만이 아니라 재료를 사용하도록 명시하셨습니다. 노아가 다른 물질을 사용했더라면 그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에 따라 행했습니다(6:22). 그것은 수단과 결과를 포함합니다. 노아는 방주를 건축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재료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결과를 가르치실 때,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 사용할 방법을 가르치실 때 순종은 이 둘을 준수하기를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II. 성경의 예

 

구약성경의 예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사용하라고 명령하시지 않은 불 피우는 향을 하나님께 가져왔습니다(10:1~2).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향을 피울 정도로 그들의 목표는 좋았습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데 불을 사용하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명시하신 수단을 무시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죽이셨습니다. 그들은 결과가 다른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너무 늦게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아말렉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무리들을 멸하라고 사울에게 말씀하셨지만 사울은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드릴 가장 좋은 동물들을 취했습니다.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드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는 정의롭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노라.”(삼상 15:11)고 사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왕으로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순종하는 것은 희생하는 것보다 더 낫습니다”(삼상 15:22). 결과는 하나님께서 명시하신 것과 다른 수단이 합당치 않았습니다(삼상 15:3, 10~23).

 

다윗과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언약궤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대상 13:2, 4). 결과와 목표는 좋은 것이었습니다. 우차(牛車)로 언약궤를 옮기는 동안 소들이 비틀거렸기에 웃사가 그것에 손을 댔습니다. 그래서 웃사를 죽이셨습니다(대상 13:6~7, 9~10).

 

하나님은 레위족속의 제사장들에 의해 궤를 운반되도록 그들을 임명하셨습니다. 다른 누구도 궤를 만질 수 없었습니다(4:15~20). 하나님은 그들이 합당한 명령에 관해 그분을 신경 쓰지 않았기때문에 웃사를 죽이셨습니다. 궤를 옮기는 것은 좋은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사용하도록 합당한 명령을 명시하셨습니다. 결과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다른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했습니다(대상 15:2, 12~15).

 

엘리사는 요단강에 일곱 번 담그라고 그러면 문둥병이 깨끗이 씻음 받을 것이라고 나아만에게 말했습니다. 치유받는다는 것은 좋은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나아만은 몹시 화가 났었습니다. 왜냐면 치유를 받기 위해서 다른 수단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은 문둥병 부위를 손으로 문질러 줄 엘리사를 원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명시하신 방법을 거절하는 한 그는 질환 부위는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방법에 따르는 결과를 추구했을 때에만 깨끗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은 결과를 낳습니다(왕하 5:9~14).

 

[삼상 13:8~14]

 

신약성경의 예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주님을 기뻐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놀라운 많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좋은 것입니다. 주님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이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7:21~23). 결과는 좋은 것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명시하신 모든 것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해 열심을 냈지만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참되신 하나님을 섬겼고,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그것은 좋은 목표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방법을 제쳐 두었습니다. 그들의 방법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구원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10:1~3).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명시하신 모든 것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이 예들은 우리가 배운 원칙을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그분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에 완전히 순종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목표를 추구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그분께서 그것을 행하라고 말씀하신 방법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III. 특별한 적용: 오늘날엔 어떠한가?

결과만 좋으면 과정은 어떠해도 괜찮다는 논리는 오늘날 사회나 정부뿐만 아니라 심지어 교회에서도 만연되어 있다는 것이 슬픈 일입니다. 이런 의식은 어떤 부분에 그렇게 퍼져 있는지를 몇 가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도덕성: 자살, 안락사, 그리고 낙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인이 잘못된 것임을 동의합니다. 하지만 사회는 어떤 상황으로 혼란이 거듭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추론합니다. 그래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거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거나 사생아로 임신했다면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 태어나지 않은 뱃속에 있는 아기를 죽이는 것을 정당화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늙거나 심각한 병을 앓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정당화 합니다. 그들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라면 그들을 죽이는 것이 그들을 돕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일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 살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대참사를 정당화했습니다. 일본도 그러했습니다. 한국 6.25 전쟁 때에도 그러했습니다. 이러한 것이 오늘날에도 세상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하늘이 아닌 불 못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21:8, 22:15). 하나님은 늙고, 병들고, 복중에 있는 아기 등에 예외규정을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어려움을 돕고, 긍휼을 베풀도록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결과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불순종함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성적도덕(性的道德)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집중적인 집회가 있을 예정이지만 여기서는 일반적인 것만 집고 넘어가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을 위한 성적 연합을 준비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데 동의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회는 이 문제에서도 혼란을 겪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성적관계를 갖는 것을 정당화 합니다. 심지어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 한 결혼하기 전에 함께 삽니다. 그들이 함께 동거하는 것은 사이가 좋은지 나쁜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당신은 사랑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당신은 결혼생활에서 젊은이들이 잘 살기를 원치 않는가?”라고 되묻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사랑이 성적관계를 정당화하고, 심지어 같은 성()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도 결혼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서로 사랑한다면 무엇이 잘못이란 말인가?” 이렇게 주장한다면 사랑은 나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성적인 연합은 서로 결혼한 남녀를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2:24, 13:4, 고전 6:9~11). 결혼 외의 관계는 사통(私通)이요, 간음(姦淫)입니다. 간통자들과 동성애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커플이 함께 행복하지 못하다면 이혼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교회들은 혼자 살면서 교회를 섬기는 것이 무척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비성경적인 재혼을 하는 것을 정당화합니다.

 

예수님은 간통의 이유로 배우자와 이혼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이유로 이혼하고 재혼하는 사람은 간음하는 것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19:9).

 

행복과 사랑이 훌륭한 목표이지만 그것들은 결혼과 성적인 순결에 관한 가르침에 불순종을 정당화하지 못합니다.

 

도박

많은 사람들은 대의명분이라면 도박을 정당화 할 것입니다. 빙고나 래플은 자선단체나 심지어 교회를 위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돈이 교육, 복지, 등에 사용될 것이라고 말을 하며 복권, 경마배팅, 심지어 카지노를 허가하고, 국가가 운영합니다.

 

하지만 도박은 여전히 하나님의 왕국 밖의 사람들이 지속하는 근본적으로 탐욕입니다(딤전 6:8~10, 고전 6:9~11). 그것은 성경적인 방법대신 재산 소유를 위해 다른 어떤 것을 갈망하는 것에 기초를 둡니다. 성경적으로 재산을 소유하는 것은 매매를 하거나 노동으로 수고하는 것입니다. 비성경적인 방법은 돈의 사랑입니다. 성경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라고 말합니다. 대의명분이 있든 없든 도박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침해하는 것입니다.

거짓말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들이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좋은 결과를 이루기 위해 하얀 거짓말을 하는 것을 정당화합니다. 물론 이 하얀 거짓말은 듣는 상대방이 더 좋게 하기 위해서이고, 상처를 주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하는 거짓말 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거짓말은 하늘의 영원한 보상이 아니고, 불 못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합니다(21:8, 27, 22:14~15).

 

사람들은 대의명분이라는 근거로 모든 악을 정당화합니다. 이런 모든 합리화는 결과를 수단화하려는 거짓 개념의 근거입니다.

 

예배(악기음악, 성가대, 현악사중주)

우리는 여러 번 이 문제에 있어 지적해왔습니다. 사람들은 악기음악, 특히 여러 가지 방법으로 특별한 무리가 노래하는 것을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대개 그 핵심은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즐깁니다. 그래서 그것이 예배를 즐기는데 무심한 젊은이들과 사람들을 이끄는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악기음악 등이 사람들이 더 영적인 것을 느끼게 하고, 그들이 교회 모임에 나오도록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신약성경 예배에서 단순히 노래하라고 말합니다(5:1, 3:16).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께서 명령하시는 것을 바꾸지 않는 것을 반복적으로 경고하십니다. 악기음악 등은 인간의 지혜와 욕망을 따르는 것입니다.

 

악기음악과 유사한 행동 뒤에 있는 근본적인 자극은 결과가 방법을 정당화한다는 것입니다. 대개의 교회는 그것이 산출해내는 효과 때문에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제사보다 순종이 더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예배를 위해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을 바꾸는 일을 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교회의 수입

교파들은 교회가 돈이 필요하다는 근거로 온갖 자금조달계획(바자회, 빙고 등)을 정당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매주 첫날에 그들이 필요한 헌금을 모음으로 기금을 얻도록 신약성경 모임에 지시하십니다(고전 16:1~2). 하나님은 다른 수단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자금을 조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 안에서 하는 것이 결과가 좋은 것인 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왜 은행을 털어 훔친 것을 교회에 기부하지 않나요? “그것은 법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므로 결과가 좋은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에 관해 법에 순종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법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께서 그분께 예배하는 우리를 원하신다는 목표만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께 예배하는데 사용해야 하는 방법도 명시하십니다. 이러한 영역에서 그분의 본을 바꾸는 것은 그분의 법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교회조직과 일

교파들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중앙 조직과 모든 종류의 사무에 사람들을 임명합니다. 질문을 했을 때 그들은 이러한 것들이 결속을 촉진시키고 자신들의 일을 조직하는데 돕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결과는 수단을 정당화 합니다.

 

성경은 일을 조직하고 결속을 촉진시키는데 사용해야 하는 수단이 교회라는 것을 가르칩니다(벧전 5:1~3, 20:28). 각 지방교회는 그들 가운데 무리들만을 감독하는 자격을 갖춘 장로들에 의해 감독되어야 합니다. 일을 감독하려고 사람이 만든 조직의 어떤 지시자나 중앙조직 아래에서 많은 교회들의 일을 중앙집권화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것과 다릅니다.

 

많은 개신교회들은 사람의 기관들을 세우고, 복음적이고, 자선적인 일에 지원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반대한다면 그 사람들은 보세요, 우리가 선한 것을 행하고 있습니다. 복음 전파하도록 후원을 하고, 필요를 돕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일들이 결과가 선한 일이라고 결정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조직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그들이 간과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파들이 그런 방식을 사용하는 것처럼 교회가 그런 방식을 사용하는 것 또한 잘못된 것입니다. 다윗은 먼저 합당한 명령에 관해 하나님과 상담하지 않고 일을 하는 것은 잘못이었음을 배웠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같은 공과를 배워야 합니다. 좋은 목표는 교회 조직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는 것을 정당화 하지 않는 것입니다.

 

 

육욕적인 끌림과 권위 없는 일을 하는 교회조직과 일

많은 교파들은 파티, 카니발, 광대, 스포츠, 연예 등을 사용합니다. 교파들은 학교, 병원, 그리고 모든 사회적인 복음사역 단체에 후원합니다. 그들의 방식에 관해 질문을 했을 때 그들은 이끌리는 큰 무리를 들먹입니다.

 

하나님은 지방교회가 해야 할 일을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은 주로 영적인 것이어야 하고, 복음을 전파해야 하며,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잃어버린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성장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살전 1:8, 11:26, 1:16, 고후 10:3~5). 우리가 사용하는 방법은 사람들의 육체적인 갈망을 나타내는 육욕적인 것이 아니고, 복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1세기 교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고, 그리스도에 관해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으로 성장했습니다(4:14~18, 딤전 3:15, 4:15~16).

 

다윗, 사울, 나아만은 먼저 하나님과 상담하지 않고 일을 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음을 배웠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같은 공과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좋은 목표는 교회 사역의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결론

구원받은 사람들은 예수께서 명령하시는 일부분만(3:22~23)이 아니라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야 합니다(28:20). 예수님의 가르침은 일반적인 목표만이 아니라 그 목표에 도달하는 것에 관해 구체적인 목표까지도 포함합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명령하시는 모든 것을 준수해야 합니다. 결과와 마찬가지로 수단을 포함해서 지켜야 합니다.

 

나답과 아비후, 사울왕, 다윗왕, 나아만, 그리고 다른 많은 성경 인물들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선한 일을 하는 것을 원하시지만 그분은 합당한 명령에 관해 상담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그들의 본으로 증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부인하지 말아야 하지만 우리는 그분의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해 그분의 지시를 부인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은 잃어버린 자들이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칩니다. 하지만 복음은 또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지시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을 바꾸었지만 이것은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예수님은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16:15~16), “회개하고, 죄 사함의 침례를 받으라.”(2:38)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으로 구원을 받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구원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거나 하나님에 대해 섬기는 것에 대해 회복해야 한다면 왜 오늘날 순종하지 않을까요? 主護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