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음료/새벽이슬처럼

받아들임이냐 아니면 거절이냐

Hernhut 2014. 11. 2. 22:29

 

하나님의 아들의 신부를 성령께서 찾으심은 사람의 영원한 구원과 관련된 그분의 다음 사역입니다. 죽음으로부터 사람의 휴거에 영향을 주는 사역, 즉 타락의 상태가 거듭남을 통해 성령께서 신부를 찾고 신부를 획득하는 포함되는 사역을 가져오게 합니다. 성령의 다음 사역은 이전 사역의 중심적인 목적과 관계가 있습니다.

 

실제에 이르게 된 이 사람과 가겠느냐?”라는 질문은 오로지 하나님의 가족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시된 질문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것을 위해서 오늘날 성령의 직임(통솔력)을 포함하는 질문입니다. 성령께서 사람의 이해에 말씀을 여시도록하고, “모든 진리 안으로성령께서 사람을 이끄시도록 하는 것을 포함하는 질문입니다. 원문적으로 이 진리는 아버지의 것에만 중점을 둘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만이 완전히 붙잡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고전 2:9~14).

 

이런 방식으로 말씀을 여시는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장차 이 영광 안에 있는 부분을 갖도록 초대를 확대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 초대와 관계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둘 중 하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초대를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거절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받아들임은 리브가의 받아들임이 어느 날 이삭의 신부가 되는 것과 관계가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날 그리스도의 신부의 일부가 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 때 이삭과 함께 하는 아들의 상속을 알게 되는 것처럼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아들의 상속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거절은 리브가가 했었던 거절이 이삭과 그의 상속과 관계없는 부정확한 위치에 그녀를 머물게 했을 것처럼 그들이 이러한 어떤 것들을 알 수 없는 위치에 사람을 머무를 것입니다.

 

받아들임이든 거절이든 어떤 쪽이든 그 가족관계는 변하지 않습니다. 리브가의 받아들임은 아브라함의 가족 안에 있는 그녀의 위치에서 변하지 않게 했고, 그녀가 거절했다고 해도 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렇습니다.

 

오늘날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구원은 과거와 성령의 완료된 사역에 근거하고, 갈보리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완료된 사역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사역은 끝난 사역입니다. 영원한 구원은 거룩한 개입을 통해 그것을 근거로 하여 완전하게 이루어졌고, 영원히 변할 수 없습니다.

 

믿음을 통한 은혜로의 구원(하나님의 은혜와 관련이 있는 복음)은 하나의 것이지만 하나님의 다가오는 영광과 관계있는 복음인 이렇게 큰 구원”(2:3), “혼의구원”(10:39)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후자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성령의 사역은 제도 도처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계시된 목적을 위해 구원받았습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성령의 중심적인 임무는 그 목적을 가져오시는 것입니다. 그 목적과 관련된 부분을 갖는 결정권은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영원히 남아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과 함께 갈 수 있거나 거절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아들의 신부를 얻기 위해 세상으로 보내어진 분이십니다. 이 결정은 그리스도인만이 하게 됩니다. 그가 하게 되는 결정은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결과들을 가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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