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이 씻고, 기름을 발랐을 뿐만 아니라 합당하게 옷을 입었습니다. 룻은 신랑을 만나러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옷을 입으라”라는 나오미의 말은 그 때를 위한 특별한 의복만을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이 사건은 보아스와 룻의 결혼으로 끝내는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룻이 입어야 했던 옷은 가까운 때에 반향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준비하는 것을 가리키는 룻의 준비는 마태복음 22:1~14절에 있는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사람은 어떤 왕의 아들의 결혼잔치에 합당치 않은 옷을 입고 나타납니다. 이 사람은 혼인예복 없이 나타납니다. 그런 그는 잔치자리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당했을 뿐만 아니라 어두운 바깥으로 쫓겨났습니다.
여기서 어두운 곳이라는 말은 달란트비유에서도 나타납니다(마 25:30). 달란트 앞의 비유는 관점은 다르지만 열 처녀 비유와 똑같이 다루고 있습니다(마 25:1~13).
마태복음 22:2절에 있는 “어떤 왕”과 “그의 아들”은 다름 아닌 바로 아버지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있는 “어린양의 혼인”을 둘러싸고 있는 잔치와 같은 장면입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요 19:7~8) 여기서 신부는 그녀가 만들어서 준비하여 가지고 있던 의복을 입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옷은 진열된 옷이라기보다 그녀 스스로가 만든 옷임이 분명합니다. 신부가 만든 옷은 “고운 세마포”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고운 세마포”는 특별하게 성도들의 “의, 의로운 행실”라고 말합니다.
룻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장차 신랑을 만나기 위해 합당한 의복을 스스로 입어야 합니다. 의로운 행실, 성도들의 웨딩예복은 그들의 부르심으로 신실함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웨딩예복이 만들어지는 동안 사역은 신실함에서 나오고, 또 합당한 그 목표를 위해 믿음을 가져옵니다(히 11:17~19, 31, 약 2:14~26, 벧전 1:9).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룻의 두 번째 준비, 즉 기름을 바름)은 웨딩예복을 만드는 의로운 행실을 수행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두 방법 중 하나에서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 나타날 것을 분명하게 계시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웨딩예복을 소유할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옷 입었다.”와 “벌거벗었다.”라는 단어는 이 두 다른 방식 안으로 각 사람들의 모습을 구별하기 위해 성경에서 사용되었습니다(계 3:17~18, 롬 8:35). 두 무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마태복음 22:10~13절에 따라서 다루어질 것입니다.
합당하게 옷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웨딩예복을 소유한 사람들)은 한 가지 방식을 따라 다루어질 것입니다. 또 합당치 않은 옷을 입은 사람들(혼인예복이 없거나 벌거벗은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질 것입니다.
합당한 옷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은 혼인잔치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어린양의 아내가 될 것이고, 그분의 왕후가 될 것이요, 그분의 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로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그 잔치에 들어갈 것입니다.
벌거벗은 사람들은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될 것입니다. 이들은 어린양의 아내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땅 위에서 그리스도의 일부로서 다스리지 못할 것입니다. 主護村成壬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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