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ethren/연(輦)모임 메시지

하늘에 속한 신성한 부르심과 함께 하는 사람: 베드로 II

Hernhut 2014. 2. 4. 10:32

 

 

사도로 임명되었을지라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주권 안에서 주의 경건한 경영을 깨달음으로 하나님과 동역할 수 있었다.

 

 

임명됨

이제 베드로에 대한 두 번째 메시지에 왔습니다. 우리가 베드로를 볼 때 우리는 그가 두드러진 특징을 가진 사람임을 봅니다. 베드로는 신성한 하늘에 속한 부르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여러 사람들과 환경들을 통해 주님에 의해 일으켜진 사람이었습니다. 비젼과 계시를 가짐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로 임명됨을 통해 베드로는 주의 신성한 통치권으로 그분의 거룩한 경영을 깨달아 하나님과 동역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경영은 주 예수께서 밤새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누가복음 6:12~13절을 읽겠습니다. 그 무렵에 그분께서 기도하러 산으로 들어가사 밤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니라. *날이 밝으매 그분께서 자기 제자들을 부르사 그들 중의 열둘을 택하시고 또한 그들에게 사도라는 이름을 주시니라.” 여기서 우리는 4가지의 중점을 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 2) 3) 예수께서 하나님 앞에서 하신 기도 그리고 4) 주님 안에서의 하나님의 경영입니다.

 

누가복음 6:14절은 “(그분께서 베드로라는 이름도 주신) 시몬.....”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첫 번째 사도임을 가리킵니다. 그 다음에 안드레, 야고보, 요한 ...등 모두 12명이 나옵니다(6:15~16). 우리의 지식에 의하면 17절은 이 열 두 사도들은 권한과 위임을 받았고, 그들은 복음을 전하러 갔으며, 주의 수많은 사람들을 이끌었다.”로 읽어야 합니다. 그분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야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 일행과 또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자기들의 병을 고치려고 온 유대와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나온 백성의 큰 무리도 함께하더라.”(6:17)

 

하지만 성경은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9장전까지 성경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능력을 주셨다고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때에 그분께서 자기의 열두 제자를 함께 부르사 그들에게 모든 마귀를 제압하며 질병을 고치는 권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며 병든 자들을 고치게 하려고 그들을 보내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취하지 말라. 지팡이들이나 짐 보따리나 빵이나 돈도 취하지 말고 덧옷도 두 벌 취하지 말라.” (9:1~3). 그런 후 6절에서 그들이 떠나서 고을들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선포하고 곳곳에서 병을 고치더라.”라고 말합니다.

 

 

발탁됨

누가복음 6장에서 주님께서 밤새 기도하신 후 그분은 12사도를 임명하셨습니다. 하지만 임명하신 후에도 주님은 그들을 쓰시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이 사람들은 박탁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 안으로 뿌려질 신성한 자질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부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필요했고, 주님의 경륜을 깨닫는 것이 필요했고, 특히 그들은 주님 자신으로 구성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주 예수에 의한 제자들을 임명하는 것은 누가복음 6장에서 있었지만 제자들을 파송하는 것은 누가복음 9장에 있었습니다. 이 부분 사이에는 2장이 더 있습니다. 주 예수님은 그들을 발탁하기 위해서 많은 것을 말씀하시고, 많은 것을 행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컨퍼런스에서 말하기를 좋아할 수 있고, “형제들이여, 전진하여 그것을 하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 예수님은 우리와 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자신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 무엇이든지 그분은 이미 그들로 그것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7~8장에서 주 예수님은 권능과 권세를 체험하셨습니다. 그분은 귀신을 쫓아내셨고, 병을 치유시키셨으며,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셨습니다. 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모든 것들을 거치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은 누가복음 9:1~6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은 그분 자신의 체험에서 산출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거치신 모든 것을 체험하는 것

주의 부르심에 이어서 우리는 주의 임명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임명하신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우리는 이 두 장반을 통해 주를 따르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따를 수 없다면 우리는 주를 위해 일할 수 없습니다.

 

12제자들은 친밀하게 주님을 따랐습니다. 주님께서 체험하신 것이 무엇이든 그들은 체험했고, 주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이든 보았으며,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들었고, 그들은 완전하게 주님께로 연합되었습니다. 우리가 9장에 올 때 주님은 제자들이 해야 할 것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그들은 그 말씀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병자들을 고쳐야 한다.”, “너희는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해야 한다.”, “여행할 때 아무것도 가지지 말아야 한다.”, “어떤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이해했습니다.

 

주님께서 누가복음 9장에서 말씀하신 것이 무엇이든지 주님을 친밀하게 따르고 있었던 누가복음 6~8장에서 그들은 이미 체험했었습니다.

 

겸손을 필요로 하고 영을 배움

이 제자들이 주님의 임명만으로 주님을 위해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꿈이 있었습니다. 한 장로형제가 젊은 형제에게 대학 사역의 책임을 맡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시 젊은 형제는 내가 위임 받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다려라. 아직 빠르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12명에 대한 임명은 위임이었지만 사도의 사역을 수행하기 위한 사실상의 위임의 때는 누가복음 6~8장에서의 체험이 여전히 필요했습니다.

 

위임은 하나의 일이요, 파송 받는 것은 또 다른 일입니다. 위임을 받았다는 것은 여러분이 파송 받을 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위치를 얻는 것은 여러분이 일을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대학사역이나 교회를 인도하도록 위임을 받을 때 우리는 더 열정적으로, 풍성하게, 친근하게 주님을 따르려고 하는 겸손한 영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조금씩 길을 주님께서 이끄시도록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른 레벨로 주님으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또 주의 깊게 장로형제들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예전에 어떤 형제가 나는 장로다.”라고 하는 것을 들었을 때 장로가 된다는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장로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사람은 자격이 없다.”라고 나는 느꼈습니다. 그는 장로에게 맞서는 불만과 좌절 그리고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많은 눈물, 기도, 부지런한 수고, 헌신과 봉사를 하는 장로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체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장로가 성도들에게 이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런 과정을 전혀 배우지 못했다면 우리는 임명된 것이 지휘관, 통솔관이 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드름을 피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주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은 주의 임명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주님의 발탁하심이 더 더욱 필요합니다.

 

 

임명된 존재를 깨닫는 것은 주님의 밤새 기도의 결과로 되었다.

먼저 베드로는 주님의 밤샘기도의 결과로 임명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어떤 이유인지 우리가 밤새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거의 보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너무 많은 준비에 집중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우리의 섬김에 있어 경건함이 적습니다.

 

주 예수는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기도 후 주님은 자신의 제자들을 부르셨고, 정식으로 12사도를 임명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밤새 기도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증거에서 흘러나와, 하나님의 증거로 가득하게 되셨기 때문에 임명 과정 동안은 불평, 나뉨, 질투, 싸움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하고 순수한 상태에서 수행되었습니다.

 

몸과 혼의 여러 질병을 돌보시고, 치료하시는 그분의 능력을 깨달음

그분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야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 일행과 또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자기들의 병을 고치려고 온 유대와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나온 백성의 큰 무리도 함께하더라.”(6:17)

 

주님은 여기서 가장 절실한 필요들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이런 필요에 자신의 크신 능력을 증명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몸과 마음의 치료받기 원했다면 그분은 그들의 몸을 치료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종이 되기 원한다면 여러분은 생명의 풍성함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고 또한 생명의 능력 안에서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방식 안에서 몸이든 마음이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이든 여러분은 그들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주님의 종이 되기 원한다면 여러분은 사람들이 병들었을 때 치료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들의 몸과 마음이 병들었을 때 여러분은 그것을 치료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공허를 느낀다면 여러분은 그들의 공허를 치료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약함을 느낄 때 여러분은 그들의 약함을 치료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지루함을 느끼고 있을 때 여러분은 그것을 치료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죄의 속박을 느끼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치료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무의미함을 느낀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치료해야 합니다.

 

여기서 주님은 심지어 평범한 곳으로 내려오시기까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낮추셨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볼 수 있고, 자신께 올 수 있고, 사람들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곳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주의 종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공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있을 때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치료가 되는 것을 공급하십니다. 진실한 사도는 문제를 해결하고, 전파하고, 사역하도록 파송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몸과 마음의 병을 치료하도록 파송되었습니다. 사도는 치료하는 자가 됩니다.

 

주님의 신성한 속성과 사람의 미덕으로부터 산출된 가르침과 증거를 얻는 것

누가복음에 기록된 주님의 산상수훈과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다릅니다. 마태복음은 여러분에게 황금률을 주십니다. 누가복음은 여러분에게 원리원칙을 주십니다(6:20~49). 내려오신 곳에서 주님은 유대인들과 두로와 시돈에서 온 사람들을 치료하셨습니다. 그 뒤에 주님은 자신의 신성한 속성과 사람의 미덕에서 산출된 자신의 증거와 가르침을 그들에게 전하셨습니다.

 

이 가르침의 초반부에 주님은 너희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왕국이 너희 것이기 때문이요, *지금 굶주리는 너희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요, 지금 슬피 우는 너희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이기 때문이라.”(6:20~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분은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악의를 품고 너희를 다루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좋은 나무가 변질된 열매를 맺지 아니하며 변질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느니라.”(6:27~28, 4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산에서의 가르침(산상수훈)은 주님 자신에 대한 말씀하심이었음

엄밀히 말해 이 가르침은 주님 자신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영 안에서 가난한 자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그분 자신과 관련된 영 안에서 가난한 자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난하신 만큼 영이 가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12살이 되셨을 때 그분은 일행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가셨습니다. 일행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분을 찾지 못했습니다. 마리아는 애타게 그분을 찾았고, 그분을 찾았을 때 마리아는 아가,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타게 하니? 봐라. 너희 아버지와 나는 낙심천만하여 너를 찾았잖니.”라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은 얼마나 평온하셨는지요! 그에 대해 예수님은 내가 반드시 내 [아버지] 일을 해야 함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 말씀의 의미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어머니도 이해할 수 없는 건가요?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해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해해야 합니다.”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분의 영 안에서 가난하게 되셨고, 그분은 사람들에게 복종하셨으며, 그들에게 내려가셨습니다(2:41~51).

 

주님은 영 안에서 가난하게 되셨고, 자신의 마음 안에서 의를 위해 굶주리시고 목말라 하셨습니다. 또한 그분의 생활은 사람들 가운데서 평화를 누리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이제 우리 안에서 그분의 신성한 속성을 이루도록 기대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사람의 미덕으로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영 안에서 가난하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향해 애절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 온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의를 위해 굶주리는 것과 목마른 것은 다른 사람을 향해 긍휼을 베푸는 것이요, 하나님을 향해 순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평안하게 하는 것은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게 된다는 것이요, 주님을 위해 비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분의 신성한 속성 안에서 그분의 사람의 미덕에서 나오는 주의 삶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런 증거를 하셨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영적인 가르침의 문제에서 여러분은 법리적인 교리나 지식적인 교육을 지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지적인 교육은 충분하지 않고, 법리적인 교리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신성한 속성을 만지도록 도와야 하고, 그분의 사람들의 미덕으로 살도록 도와야 합니다. 왜냐면 이런 것들이 그들에게 가르침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사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침이 되고, 치료가 되는 것

주 예수께서 제자들을 훈련하시고 계실 때 그분은 두 가지 원칙들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첫 번째 원칙은 여러분이 사도라면 모든 질병을 치료하는 법을 알아야 하고, 모든 필요를 채워야 합니다. 주의 종은 치료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불미스런 환경에 있을 때 여러분은 그 교회를 치료하러 갈 필요가 있습니다. 한 형제가 연약할 때 여러분은 그를 치료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형제가 부족할 때 여러분은 그를 치료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여러분은 치료자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료하는 것은 주의 증거에 바탕을 두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 안에 주님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원칙은 여러분의 모든 가르침은 여러분의 증거에서 나옵니다. 여러분이 증거가 없다면 여러분은 가르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증거를 가져야만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르치는 것은 여러분 안에 계신 분이시요, 여러분이 여러분 안에 건축한 것이요, 여러분이 산 것이요, 주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사역하신 것입니다.

 

주를 깨닫는 것은 그분의 신성한 속성을 경영 안에서 치료하는 것

주의 가르침과 증거를 가지신 후 여러분이 보아야 하는 첫 번째 것은 주의 신성한 속성입니다. 누가복음 7:1~10절에서 주님은 그분의 치유가 단지 치료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그분의 속성 안에서 경영이었음을 계시하셨습니다.

 

가버나움에서 어떤 백부장의 노예가 앓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막 치료하시려고 가셨을 때 백부장은 친구들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 친히 수고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내 지붕 아래로 들어오심을 내가 감당할 자격이 없나이다. *그러므로 내 자신이 주께 나아갈 자격도 없는 줄로 생각하였사온즉 오직 한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종이 낫겠나이다. *나도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이며 내 아래에도 군사들이 있어 내가 이 사람더러, 가라, 하면 그가 가고 저 사람더러, 오라, 하면 그가 오며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그가 그것을 하나이다,”(7:6b~8)라고 그분께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이 사람의 말을 들으셨을 때 그분께서 이스라엘에서 이 사람이 가진 믿음보다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을 찾지 못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이처럼 기뻐하셨을까요? 이 백부장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졌기 때문에 그로 인해 하나님의 신성한 속성을 경영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마음은 보라. 나는 하나님이다. 나는 땅의 왕국의 실제를 얻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 같았습니다. 왕국의 실제는 무엇입니까? 왕국의 실제는 아버지께서 가라하면 아들이 가고, 아버지께서 오라하면 아들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가고, 하나님께서 오라 하실 때 우리는 옵니다. 우리는 신성한 생명에 대한 유기적인 통치권 안에서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다시 배울 새로운 공과가 있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치료하는 문제, 증거하는 문제, 가르치는 문제뿐만 아니라 신성한 통치권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주의 풍성하신 긍휼과 그분의 긍휼 안에 있는 그분의 역동적인 경영을 아는 것

주 예수께서 자신의 신성한 통치권을 알 사람들에게 왔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풍성한 긍휼과 그분 안에 있는 자신의 역동적인 경영을 알 사람들에게 오셨습니다.

 

누가복음 7:11~17절은 나인성에서 홀어미 아들이 죽은 사건을 기록합니다. 나인Nain초원, 풀을 뜯게하다, 환경을 의미하고, 더 나아가 은혜를 뜻합니다. 이것은 은혜 안에서 홀어미를 치료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주 예수께서 나인성에 도달하시지 않으셨지만 자신의 긍휼과 은혜를 발휘하실 목적을 가지시고 거리를 두시고 걸어가셨습니다. 그 때 외아들을 잃은 과부가 정말 슬퍼했습니다. 이 과부는 절망적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주님께 기도하고, 말하는 방법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군중들이 애도하고 있었을 때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누가복음 7:12~13절을 읽어 봅시다. 이제 그분께서 그 도시의 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보라, 죽은 사람이 실려 나오는데 그는 그의 어머니의 외아들이요, 그녀는 과부더라. 그 도시의 많은 사람들이 그녀와 함께하거늘 *[]께서 그녀를 보시고 그녀를 불쌍히 여기사 그녀에게, 울지 말라, 하시고

 

큰 무리가 그녀와 함께 있었을지라도 그녀를 돕거나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 대부분 함께 슬퍼해주고, 약간의 동정심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주 예수께서 그녀를 보시고, 그분은 그녀에게 동정에 이끌리시어 슬피 울지 마라.”고 그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관에 손을 대셨고 그 관을 나르던 사람들이 멈춰 섰습니다. 예수께서 청년아,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사람이 일어났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종이 되기 원하고, 여러분 안에서 주의 신성한 속성과 사람의 미덕을 주님께서 기르시기를 원한다면 조금씩 주님께서 여러분을 가르치시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치료하는 것을 알고, 증거하고, 주님의 통치권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여러분은 그분의 풍성하신 긍휼 안에서 주의 통치적인 경영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주의 종으로서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서 하나님의 권능이 이루어지도록 주의 통치권 아래에서 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은 가까이로 오셔서 관에 손을 대시고 죽은 아들에게 젊은 사람아, 일어나라.” 말씀하신 예수와 똑같이 긍휼로 가득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사람들이 여러분의 긍휼을 필요로 한다는 것과 그들이 여러분의 사역의 열매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야합니다. 사람들은 기껍게 여러분의 열매가 되지 않습니다. 긍휼이 없는 사람은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원칙적으로 주의 종은 치료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가르침은 그의 증거요, 그의 생활입니다. 그런 후 그는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에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동시에 사람들을 향해 긍휼로 가득해져야 합니다.

 

주의 종은 주님이 없고, 기쁨 없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는 긍휼을 베풉니다. 고통, 근심, 슬픔 중에 있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긍휼을 베풉니다. 소망이 넘치는 우리는 주님께 주님, 저는 당신의 긍휼 안에서 섬기고, 사역하고, 살기 위해선 당신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저는 긍휼하심 안에 저의 사역과 섬김이 있기를 원합니다. 또한 긍휼이 흐르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 예수의 유일한 사역과 그 사역의 확실성과 경영, 포괄성을 아는 것

 

1. 주님의 유일한 사역의 확실성

요한의 제자들은 주님께서 행하신 모든 것을 요한에게 보고했습니다. 그 때에 이미 요한은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주께 보냈고, “선생님이 오실 그분이오니이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리오리이까?”(7:18~19)라고 묻도록 했습니다. 요한이 그렇게 묻는 의도는 당신께서 오실 그분이시면 왜 저를 여기서 구원하시지 않습니까?”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자신의 사역의 완전한 확실성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길로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들을 요한에게 고하되 곧 눈먼 자들이 보며 다리 저는 자들이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정결하게 되며 귀먹은 자들이 들으며 죽은 자들이 일으켜지며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선포된다 하라.”(7:22) 그리고 주님은 추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할 자는 복이 있도다.”(7:23) 주님은 마치 요한아, 나로 인해 실족하지 마라. 감옥에서 너를 구원하는 것이 나의 사역이 아니다. 나의 사역은 가난한 자들이 그들에게 선포한 복음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나는 형제들에게 여러분이 주님을 섬긴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신성한 속성으로 구성되어야 하며, 그분의 사람의 미덕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 후에 여러분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것입니다. 우리의 섬김으로 맹인들이 볼 수 있게 될 것이요, 걷지 못하는 이들이 걷게 될 것이요, 한센병자들이 깨끗하게 될 수 있고, 죽은 자들이 일어날 수 있지만 우리의 임무는 하나님의 복음이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복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복음으로 말해야 합니다.

 

2. 사역의 경영에 대한 포괄성

누가복음 7:24~26절을 읽겠습니다. 요한의 사자들이 떠난 뒤에 그분께서 사람들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기 시작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느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느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하게 차려입고 호화롭게 사는 자들은 왕들의 뜰에 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느냐? 대언자냐? 그러하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대언자보다 훨씬 더 나은 자니라.”

 

구약성경에 있는 모든 선지자들은 사람 안에서 주 예수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사람 안에서 주 예수를 소개했습니다. 요한은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구약성경에 있는 모든 선지자들 보다 더 큰 자였습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서 주 예수를 살아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요한보다 훨씬 더 큰 자입니다.

 

주 예수는 요한에게 다시 명령하셨습니다.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얼굴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하신 말씀이 가리키는 자가 곧 이 사람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들 가운데 [침례자] 요한보다 더 큰 대언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국에서 가장 작은 자가 그보다 더 크니라, 하시니라.”(7:27~28) 그분의 사역이 유일하였기 때문에 주 예수의 사역 외에 다른 사역이 없었습니다. 이 유일한 사역이 경영될 때 능력이 가득하고, 분명하고, 동시에 포괄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주님은 요한을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주의 마음 안에서 주 예수님은 요한이 자신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에 실망하셨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그는 나를 따르지 않았다. 그가 나를 따랐다면 그는 하나님의 왕국 안에 있을 것이다. 그가 나를 따르지 않았기에 그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실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위해 계속해서 증거할 것이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들 중에서 요한보다 더 큰 자가 없다라고 말이다.” 이것은 주님의 사역의 합당한 포괄성을 보여줍니다.

 

 

3. 사역의 경영에 대한 확실성과 포괄성 사이에 있는 균형

여러분, 주 예수님은 여러분이 여러분의 온 생명 전체에 있어야 하는 영이 가지셨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것을 붙잡아야 하고, 이것을 생명의 가득함, 능력의 가득함, 기능의 가득함, 신선함이 가득함, 계시의 가득함, ()의 가득함과 생명을 공급하는 경영으로 바뀌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경영이 얼마나 강하든, 얼마나 높든, 얼마나 부하든 여러분은 주님께서 요한을 쓰신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에 의해 쓰임 받는 종으로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천연적인 자아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안에 건강하게 구성된 신성한 속성을 받아들일 때에만 하나님께 쓰임 받는 종에 포함되고, 존중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종은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사람들의 모든 병을 치료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의 가르침은 바로 그 사람의 구성이어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신성하신 통치권 아래에서 살아야 하고, 풍성한 긍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는 사람들을 향해 긍휼의 풍성함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유일한 사역을 향한 확실성을 가져야 하고, 사역을 향한 그의 확신 안에서 포괄성을 가져야 합니다.

 

대부분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포괄적이지 못합니다. 때론 우리는 포괄성을 가지고 있지만 확실성을 가지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런 모든 상황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나는 예수께서 설계하신 교회 방법에 확신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회중 안에 모든 성도들을 포함합니다. 동시에 나는 예수께서 설계하신 교회를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면 모든 회중 안에 성도들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회중 안에 있는 성도들을 사랑하든, 내가 무엇을 붙잡든 여전히 예수께서 설계하신 교회의 방식을 따릅니다. 하지만 내가 예수께서 설계하신 교회의 방식을 취한다 할지라도 나는 모든 회중들의 성도들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모든 회중 안에 있는 성도들은 나의 사랑하는 형제요, 자매들입니다. 나는 사랑, 인정함, 존중, 그리고 포괄성이 필요합니다. by 주호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