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난번에 격려가 왜 필요한지를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데살로니가전서 5:1~10절에서 볼 수 있는 이 어둔 세상에 있는 빛들로서 우리가 살 수 있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1절은 “누구?”라는 질문에 답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지금 하고 있는 것 같이 너희끼리 서로 위로하고 서로를 세우라.”
격려가 필요한 이는 누구인가?
사도바울은 어려움을 체험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곳에 있는 교회들에게 모델이 된 데살로니가교회에 이 단어를 사용해서 편지를 썼습니다(살전 1:6~7). 바울은 또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로 받는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도 기록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바울은 주님께서 오시는 장래 소망에 대해 그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는 격려를 받는 것과 격려가 필요하다고 썼습니다. 비록 특별한 교회에 썼을지라도 이 단어는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하는 우리는 여전히 문제들로 가득한 어둠과 망그러진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오셔서 모든 것을 회복시키실 그날을 여전히 고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누구든, 어디에 살든, 어떻게 섬기든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누구든, 어디서 살든, 어떻게 봉사하든 상관없이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행하고, 그들이 말하는 것 모두 세력권(勢力圈) 안에서 주님의 빛을 밝게 반사하도록 하는 격려가 필요합니다.
누가 격려를 하나?
“그러므로 너희가 지금 하고 있는 것 같이 너희끼리 서로 위로하고 서로를 세우라.”(살전 5:11) 이 구절에 의하면 우리는 서로 격려할 책임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서로”, 원어인 “알레론allelon”이 여러 번 사용됩니다. 이 단어는 믿는 성도들, 다른 사람들을 향한 서로, 상호적인 수고를 묘사합니다. 격려, 파라칼레오parakaleo에 대한 단어는 서로를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이 더 강한 것이요, 서로의 편으로 향하는 것을 묘사합니다. 우리는 믿는 성도들을 따르는 것을 돕기 위해 찾아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격려의 근본의 원천이십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분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요 긍휼의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니라.”(고후 1:3) 여기서 위로는 격려입니다. 여기서 쓰인 파라클레시스paraklesis는 명사형으로 헬라어 동사 파라칼레오parakaleo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위로할 때 우리는 주님께서 공급하신 것을 깊이 잡아당기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심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위로 받을 때 얻는 위로(파라클레시스paraklesis)를 힘입어 우리가 어떤 고난 중에 있는 자들도 능히 위로(파라칼레오parakaleo)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4) 서로 격려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지금 하고 있는 것 같이 너희끼리 서로 위로하고 서로를 세우라.”(살전 5:11)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게서 격려를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격려를 하고 있습니까? 아마 여러분은 더 효과적으로 격려하는 방법을 더 연구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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