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ethren/연(輦)모임 메시지

예수의 멍에 <연합 연(輦)모임>

Hernhut 2013. 2. 13. 19:35

예수의 멍에

 

by Hernhut Sung

 

마태복음 11:28~30절을 읽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혼이 안식을 찾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기 때문이라, 하시니라.”

 

멍에

오늘 우리는 “멍에를 쓰신 예수”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멍에”라는 단어를 들을 때 우리에게 어떤 반응이 나타나지요? 아마도 우리의 첫 번째로 떠오르는 것이 “나쁘다.”라는 느낌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멍에 아래에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철로 된 멍에 아래에 있는 불가능함과 중압감을 체험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멍에라는 단어 그 자체가 중립적인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멍에는 부담을 의미합니다. 멍에는 제어를 의미합니다. 멍에는 노예임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좋은 것이 될 수도 나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죄와 죽음의 멍에 아래에 있다면 그것은 소름이 돋고, 끔직한 것이 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멍에를 짊어지고 있다면 그것은 아름답고 신선한 것입니다. 적으로부터 우리에게 가져오는 멍에는 무겁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멍에는 가볍고 쉽습니다. 우리가 죄와 죽음의 멍에를 짊어지고 있다면 감당하기 힘들고, 절망적이지만 하나님의 멍에를 짊어지고 있다면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은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멍에라는 단어에 대하여 편견을 없기를 소망합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택한 것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자유롭게 창조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다른 말로 사람은 선택이 자유롭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후 계속해서 간섭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택을 자신들이 하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동산 한가운데 생명의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자라도록 하셨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사람 앞에 이 두 나무를 두시고 사람이 그들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또 우리는 선택한 아담과 이브가 우리의 조상임을 압니다. 물론 그들은 적에게 유혹을 받았습니다. 다른 한 면으로 우리는 그들이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을 압니다. 생명의 나무를 선택하는 대신 그들이 선택한 것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습니다. 왜 그들이 이렇게 선택했을까요? 내 생각에는 아마도 주된 이유 중 하나가 그들은 자유롭기를 원했고, 그들 스스로가 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간섭 아래에 있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떤 권능 아래에 있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자유로워진 후에도 그들은 계속해서 자유로워지기 원했습니다. 그들은 독립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멍에 없이 생명을 갖는 것이 선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놀랍게도 그 결과는 반대였습니다. 그들은 자유를 원했지만 그들은 얽매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죄의 법과 죽음의 법에 매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철로 된 멍에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 멍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생명의 나무를 선택했어야 했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그들이 남에게 의지하는 삶이 되었을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 했어야 합니다. 그들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생명이 필요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형제, 자매님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자유롭도록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자유로웠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선택의 자유를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그 일 뒤에 있는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따른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신 창조 사역이었습니다. 그 사역 뒤에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을 쓰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이 그분의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그분의 목적에 봉사해야 했다면 사람은 하나님 아래에 있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를 말하는 것이 옳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사람창조에 대한 이유를 즉시 말씀하시지 않았을지라도 우리 모두는 사람이 하나님의 걸작이라는 것을 압니다. 사람만을 하나님은 그분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창조하신 뒤에 어떤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봉사하는 사람을 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천사장 혹은 대천사가 하나님을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장(대천사)을 가두는 것이 정말 쉬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어야 했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없을 것입니다. 큰 자가 작은 아이를 이겨는 것으로 거기엔 영광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즉각적으로 사탄을 다루셔서 처리하시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그분은 천사들보다 더 작고 낮은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분은 골리앗을 이기기 위해 다윗을 사용하셨습니다. 우리가 시편 8편을 읽는다면 우리는 아름다운 구절이 있음을 압니다. 시편 8:2절을 읽어봅시다. 또 주께서 주의 원수들로 인하여 아기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 힘이 나오게 명하셨나니 이것은 원수들과 복수하는 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찬양을 하도록 하기 위해 아이들과 젖먹이들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이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것은 그분의 상대이기 때문입니다. 적과 복수하는 자들을 다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창조 뒤에 하나님께서 그분을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 사람을 사용하신다는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 것을 압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적은 깨질 것입니다. 그 이유 때문에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의 아래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그것을 행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멍에에 있기를 선택한다면 하나님의 목적은 충만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내질 것입니다. 불행스럽게도 우리의 조상들은 하나님의 멍에를 메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자신이 좋아한 것을 행하는 것이 완전한 자유가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하나님의 멍에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속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는 사탄의 멍에를 짊어졌습니다. 처음에는 보기도 좋고 탐낼만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사탄의 멍에는 다 그런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가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수고롭고 무거운 짐을 싣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는 전에 주 예수 안에서 믿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아담으로부터 태어났습니다.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 그는 자유로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때어났을 때 우리는 자유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죄와 죽음의 종 아래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적의 지배아래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진노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우리 안에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다른 말로 우리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자가 되었고, 수고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나는 몇 년 전 1937년의 중일전쟁 때 중국 오지 윈난, 쓰촨, 그리고 구이저우에 있었던 형제의 메시지를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곳들은 높은 산악지대입니다. 그들이 여기에 갔었을 때 그들은 오늘날과 같이 차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휘발유가 없어 숯만으로 버스를 움직이게 했고 이 버스는 산을 오르락내리락 했답니다. 그들은 버스에서 앉기가 불안했답니다. 그들이 여행을 했을 때 몇 명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윈난에서 시작해서 구이저우와 쓰촨으로 산을 가로질러 갔답니다. 거기 사람들은 소금 덩어리를 바구니에 가득채운 후 머리와 등에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윈난은 소금이 있지만 쓰촨은 소금이 없습니다. 그래서 쓰촨 사람들은 소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소금을 얻으려고 그런 풍경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윈난에서 또 다른 쓰촨으로 소금을 운반했을까요? 그들은 사람들의 등으로 소금을 운반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등으로 가방을 메고서 쓰촨으로 와야 했습니다. 그들은 손에는 지팡이를 붙잡고 산을 가로질러 걷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피곤하면 휴식을 취해야 했지만 길바닥에 내려놓을 수 없었습니다. 왜 그들이 그같이 길 도중에 소금 바구니를 내려놓고 휴식을 취할 수 없었을까요? 소금 바구니를 내려놓으면 좋은 소금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손에 들고 다니던 막대기 위에 소금 바구니를 올려놓고 서서 휴식을 취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타고 있던 버스가 그곳을 지나갈 때 그렇게 길도 중에 서서 휴식을 취하는 그 사람들이 측은함을 느꼈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무거운 짐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힘겨운 노동아래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모든 생활이 이런 힘겨운 것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소망이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기 전에 이러한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지만 우리는 불평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만나기 전은 이 쓰촨성 사람들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전에는 우리도 무거운 세상의 짐으로 가련해 보였을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모두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도록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정말 무거운 짐을 가진 우리는 우리의 죄를 우리의 머리 위에 이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정말 휴식이란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이 짐과 죄로부터 쉬게 하시겠다고 우리를 오늘 초청하십니다. 우리가 주 예수께 왔을 때 우리는 짐이 가벼이 옮겨지는 것을 압니다. 여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상당히 다릅니다. 나는 나의 짐이 기계로 가볍게 옮겨짐을 느낍니다.

 

이것이 우리의 체험입니다. 우리가 버거운 멍에를 벗은 것, 우리 주 예수께서 무거운 짐을 깨신 것을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나요? 우리는 자유를 느낍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 생명을 갖기 원합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자유롭게 하신 것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자유롭게 될 수 있는 자유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를 떠난 후

형제, 자매들이여,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자유롭게 하시려고 모세를 이집트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파라오에게 “내 백성을 가게 하라.”고 말하도록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 했을까요?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 이었습니다. 그들은 파라오를 섬겼습니다. 그들은 파라오의 무거운 멍에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힘든 노동을 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소망조차도 없었습니다. 모든 사내아이들이 나일강에 던져져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해서 하나님은 그들을 구출하셨습니다. 그들은 이집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자유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시나이 산으로 이끄셨습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내 언약을 지키고, 내 율법을 지킨다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광야에서 그들의 모든 필요들을 공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땅 안으로 그들을 이끄시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시나요? 하나님은 그들을 자유롭게 하셨지만 그들은 그들의 자유를 남용했습니다. 그들은 정말 자유롭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유, 하나님의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투덜댈 수 있는 자유, 모든 것들로부터의 자유를 갖기 원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유로움을 주신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얼마나 자주 이런 것을 행하는지를 압니까? 사소한 것조차도 투덜댈 때가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주 예수에 의해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여러분은 어떻게 살았나요?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원하는 것 어떤 것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위해 살 수 있나요?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무거운 멍에에 우리 자신을 다시 한 번 집어넣는 꼴이 됩니다. 여러분은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이집트는 여전히 그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그들은 이집트를 떠올렸습니다. 습관과 문화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습성들은 무섭습니다. 오늘날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통해 자유로운 항해를 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의 뜻에 대항하여 어떤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투덜댑니다. 이럴 때 우리는 반역을 꽤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세상으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그 때가 훨씬 힘들지 않았어.’라고 노동과 수고로 억눌려 살던 그 때를 추억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육체의 속박아래에 있습니다. 우리는 무거운 짐(부담) 아래로 스스로 찾아갑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로 선택함으로 그분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다.

우리는 어떻게 무거운 짐으로부터 나올 수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혼이 안식을 찾으리니”(마 11:29b). 우리는 우리 주 예수께서 적의 무거운 멍에로부터 구출하신다는 한 가지를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선택하고 그분의 멍에 아래에 있기를 선택함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이것이 자유롭게 하는 유일한 참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행하는 것이 우리 스스로의 압제 아래에 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난 교황들과 추기경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내 자신이 한 교황인 것에 두려워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짐 아래에 있을 때 그것은 강한 멍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옳은 선택을 했다는 이야기고 또 우리가 그분을 따르는 것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멍에의 공과

멍에가 무엇입니까? 오늘날에 들에서 추수를 시작할 때 트랙터를 사용하기 때문에 멍에가 무엇인지를 아는 젊은 사람들을 보면 나는 놀랍니다. 오래전에는 들에서 추수하려고 곡식들을 거둘 때 소, 말, 노새를 이용했습니다. 그런 동물들의 목과 등에 긴 나무 봉을 얹어서 일을 시켰습니다. 멍에의 용도는 동물들을 농사꾼의 의도대로 조종하기 위해서 고통을 동물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목이 매주 중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저항을 할 때 우리는 뻣뻣한 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정을 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목에 자극적인 것을 올려놓아야 함을 압니다. 그런 후에야 땅을 갈아엎을 것입니다. 우리는 젊은 사울을 기억합니다.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이었던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으려고 다마스커스로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다마스커스 도시 근처에 있었을 때 빛이 그의 위에 비추었습니다. 그리고는 땅으로 비치는 빛에 매혹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네가 가시채를 걷어차느라 고생이구나.”(행 9:1~9)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그가 들었습니다. 우리는 말과 노새와 황소가 그 고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동물들이 자기 고집대로 가려고 하려고 해서 멍에 아래에 둔다는 것을 압니다. 그와 같이 자기 길로 가려고 하는 일이 일어날 때마다 농부는 가시채라고 불리는 막대기를 가지고 농부가 의도하는 대로 가도록 할 때 사용합니다. 농부는 동물들의 다리를 부드럽게 치는데 이 가시채를 사용할 것입니다. 하지만 말, 노새, 황소는 그 가시채를 뒷발로 걷어찰 것입니다. 뒷발로 걷어찰 때 그것은 상처를 냅니다. 농부는 동물들에게 상처를 내는 것을 원치 않지만 여전히 그렇게 합니다. “이놈들아, 주인이 여기 있다. 네 놈들은 내 일을 하고 있다.”라고 농부는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동물들은 이해를 못하고 계속해서 가시채를 걷어차 상처를 내지요. 많은 상처를 낸 후에 동물들은 공과를 배우지요. 우리도 얼마나 이런 동물들과 같은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역을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압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목적을 위해 자유롭게 봉사하도록 하셨다는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주인이 있다는 것을 압니까? 우리는 그분의 사역을 넘치도록 가지고 있습니다. 수시로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유롭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행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이유 때문에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그 이유 때문에 구원받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우리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진정으로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요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경고는 하시지만 여러분에게 강요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위에 그분의 멍에를 기꺼이 취하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성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 스스로 봉헌해야 한다.

우리는 믿는 자들이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야하는 이유를 압니다. 예전에 내가 구원받았을 때 사역자들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드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설교자, 목사가 되려하는 자들만이 그들의 삶을 드리는 것이 필요하고 일반적인 성도들은 그렇게 행하는 것이 필요 없습니다. *{경고}참고로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분하여 쓰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인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구분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구분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목사들은 성직자와 평신도를 나누는 발언들을 쉽게 씁니다. 그러나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어찌되었든 그 결과는 하나님을 섬기는 소수만이 있었고 다른 모든 형제, 자매들은 그들 자신들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경고}이런 제도에 있는 우리는 십일조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모든 믿는 이들,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은 주님께서 우리를 “나를 따라오라.”고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님께서 땅에 계셨을 때 주님께서 그분의 제자들을 어떻게 부르셨는지를 기억합니까? 그분은 “너를 부인하라. 나의 십자가를 지라. 그리고 나를 따라오너라. 그러면 나는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여러분 위에 주님의 멍에를 질 우리를 부르십니다. 멍에는 짐이지만 주님의 짐은 가볍습니다. 주님의 멍에는 쉽습니다. 주님은 그분의 권세 아래에 있을 우리를 부르시고, 그분의 제어 아래에 우리 자신을 둘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완결을 위해 우리를 쓰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그렇게 행하셨습니까? 여러분은 더 이상 여러분 자신을 위해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얽매이는 것입니까? 우리는 주님과 주님의 뜻을 위해 살기 원합니다. 우리는 제단에 여러분을 올려놓기를 기꺼워합니다. 영광의 그릇과 주님의 목적을 섬기는 여러분이 되도록 주님께 허락하기를 또한 기꺼워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진 멍에

이제 우리 주 예수 자신께서는 멍에 아래에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과 동등 되셨고, 자신을 비우셨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은 종의 형태로 자신의 짐을 짊어지셨습니다. 그분은 사람의 모습으로 자신의 짐을 짊어지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사람을 우리에게 이증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하나님의 멍에 아래에 자신을 두셨다는 것을 주님의 생애 전체에서 알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이 충만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부인하는 문제, 십자가를 취하는 문제, 주님을 따르는 문제가 언제인지를 알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우리 자신이 관련되기까지는 우리는 멍에 아래에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 때가되기까지 우리 자신을 부인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통제 아래에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권위 아래에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을 섬기기를 원치 않지만 다른 사람들이 우리 자신을 섬기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부르심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그러한 것에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까요? 어디에서 우리가 그것을 실행할 힘과 능력을 가지고 행사할까요?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우리는 우리자신으로 인한 하나님의 멍에를 취하는 것은 부르심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멍에를 취하는 것이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의 멍에를 짊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전에 있다는 것을 압니다. 농부가 땅을 갈려고 할 때 많은 동물들을 이용합니다. 농부는 더 빠르고 좋게 하기 위해서 두 말, 소, 노새들을 이용할지도 모릅니다. 그가 보통으로 행하고 있었던 것, 곧 훈련되지 않은 소와 함께 훈련된 소를 멍에를 메도록 할 것입니다. 그것은 두 배나 되는 멍에입니다. 왜 그같이 하는 걸까요? 그것은 훈련된 소가 순종을 배우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인의 인도를 믿음으로 따를 것입니다. 하지만 훈련되지 목한 소는 그 때까지 자신의 의지가 있고, 그 의지는 아직까지 깨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멍에를 함께 지고서도 여전히 자기 길로 가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훈련된 소는 강하고 그 의지가 훈련되지 않은 소를 끌어당깁니다. 훈련되지 않은 소는 점차적으로 훈련된 소의 성격을 배웁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채우는 방법입니다.

 

마음 안에서 겸손하고 온유하라.

주님은 자신에게 와서 하나님의 멍에를 짊어지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주님께서 “와서 나의 멍에를 지라. 내가 너희와 함께 질 것이라. 너희는 훈련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훈련되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온유함

온유함이 무엇인가요? 성경은 모세가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온유하다고 말합니다. 우리 생각에 모세는 가장 남성적이고, 힘이 있고, 가장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온유하게 될 수 있었습니까? 성경은 모든 사람들 가운데 중에 가장 온유한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왜 온유한 사람이었습니까? 모세는 완전하게 굴복되었고 순종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아주 작은 것에도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훈련된 건축가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당시 이집트에는 피라미드로 유명했었습니다. 그 피라미드는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수수께끼처럼 풀리지 않는 점들이 아주 많은 비밀스런 건축물들이지요. 그러한 건축물을 세웠던 그에게 하나님께서 장막을 만들라고 그에게 요구하셨을 때 그에게는 너무 쉬운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적은 기회를 실행할 수 없었던 것을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적은 항목 모두 그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그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그라나 그는 믿음이 있는 자였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온유한 자였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우리 주 예수께서 계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얼마나 온유하신지요! 주님은 “나는 어떤 것도 내 자신이 할 수 없다. 어떤 것도 말 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 그것은 우리 주 예수님의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이 해답이십니다. 그 순종이 우리의 삶 가운데 건축되어야할 특징이요, 성격입니다. 우리가 섬김에 관해서 말할 수 있기 전에 특징이 건축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안점은 사역을 실행하는 것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안점은 옳은 사역을 실행하려는 옳은 사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멍에 아래에 있다는 의미가 무엇인가요? 첫 번째요, 주된 의미는 특징과 성격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맞지 않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영리하고 똑똑하더라도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능력이 있고,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을 실행하는 데는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적을 물리칠 수 없고, 그리스도의 성품만으로 적을 무찌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와 순종은 우리의 생활 속에 건축되어야 합니다. 온유와 순종을 건축하는 방법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항하려고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요, 그분은 우리를 끌어당기실 것입니다. 마음에 온유하고 겸손하십시오.

 

낮아짐, 겸손

낮아짐,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낮아짐은 단순하게 그분께서 절대로 그분 자신을 생각하는 것이 아님을 생각합니다. 겸손은 열등한 것의 복합체가 아닙니다. 열등한 것의 복합체는 자의식(自意識)이요, 수줍음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완전하게 그분자신에 대해 알고 계시지 않고 계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알고 계실 뿐입니다. 자신이 아닌 아버지 하나님을 알고 계시다는 것이 마음에 겸손하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멍에를 짊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쓰심이 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우리를 부인하는 것이요, 십자가를 지는 것이요,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겸손, 낮아짐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성격을 묘사하게 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또 그 성격과 특징은 건축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사역은 수행될 것입니다. 영적인 사역은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니요, 특성을 기초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표면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말 적을 패배시킬 것입니다. 또 그 의지는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이끌 것입니다. 겸손과 낮아짐은 적을 패배시키고, 하나님의 왕국을 건축할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낸 주님의 종들에게서 온 편지들을 기억합니다. 헝가리, 인도, 중국, 몽골, 그리고 독일 등에 있는 교회들은 좋은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용하시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정말로 쓰셨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몇몇의 자매들이 있었고, 자매들을 인도하고 있었고, 그들은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방식에서 몇몇의 자매들 사이에 경쟁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아지려고 했습니다. 자매들 가운데서 더 영향력을 가지려고 했습니다. 이 문제에 어떤 해답이 있을까요? 그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유정형제님이 했던 것을 기억하시죠? 그는 서로를 돕는 자신의 동료요, 짝이 되도록 했습니다. 우리는 동료가 유정형제님이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은 거기에 동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배운 자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배웠기 때문에 유정형제님은 이 자매들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참된 섬김입니다. 교회 안에는 높낮이가 없습니다. 단지 서로를 돕는 지체들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를 배우고, 서로를 격려하는 동료들만이 교회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섬김이요, 겸손입니다. 25년 전 나는 하이야 선교회를 일으켰습니다. 그 때 만난 채희환형제가 지금도 그 때에 가르쳤던 것을 실천하면서 교회의 한 형제가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그의 간증에는 놀라움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 목사가 성직자가 아닙니다. 성도들이 평신도가 아닙니다. 목사도 한 지체요, 성도들도 한 지체입니다. 이들 중 한 지체만 없더라도 교회는 불안전합니다. 목사가 있다고 해서 온전한 교회라 말할 수 없고, 목사가 없다고 온전치 못한 교회라 말할 수 없습니다. 목사들과 지체들은 동료입니다. 목사들 역시 교회의 지체들이요, 교회의 동료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멍에를 지기를 기꺼워하는가?

여러분, 내가 소망하는 것은 여러분이 기억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짊어 져야하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이 곧 멍에다.”라고 말해왔습니다. 그 멍에는 우리를 가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멍에를 짊어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계획이나 일에 자신의 멍에를 짊어질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강요하시는데 사랑을 사용하시지만 솔선수범하여 짊어지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멍에를 기꺼운 마음으로 짊어지십니까? 여러분은 그분께 배우기를 자원하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목적으로 가득 채우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은 그분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기꺼워하십니까?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참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주님, 우리는 당신을 찬양하고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높습니다. 당신의 방식이 우리의 방식보다 더 높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되기를 원했던 것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당신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은 당신의 것이 훨씬 더 좋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짊어지라고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짊어질 멍에는 주님께서 함께 지신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당신께 가서 배우기를 원합니다. 오 주님,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가르치소서. 그것은 당신의 영광을 위한 모든 것입니다. 아멘 / 2013년 2월 8일~ 12일에 있었던 확대 연(輦)모임에서 전달된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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