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ethren/연(輦)모임 메시지

그리스도인들의 인도자들에게 주는 조언

Hernhut 2008. 12. 22. 15:21

그리스도인 지도자를 위한 조언

예수께서는 그분의 공생애 기간 동안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에게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분의 어떤 말씀들은 매우 가혹했습니다. 그분의 비난들과 꾸짖음으로 정말로 유대교의 지도자들 가운데 있는 문제의 뿌리를 만지셨습니다. 그것은 모두 “마음의 문제”로 생겼습니다. 거기에는 지도자들의 마음속에 많은 문제가 있었는데 지도자들은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증거로 마태복음 23장에 기록에 의해 그 지도자들에게 몇몇 그분의 강력한 말씀들 생각해 보십시오.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를 위한 접시와 컵의 겉은 깨끗하나 너희 안에는 약탈과 방종이 가득하도다. 눈 먼 바리새인들 너희는 먼저 접시와 컵의 안을 깨끗하게 하라 그렇게 하면 그것의 밖이 또한 깨끗하게 되리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이것은 마치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에는 아름답게 보이나 너희 안에는 죽은 사람들의 뼈들과 모든 더러움으로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의롭게 보여도 너희 안으로는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도다”(마23:25~27).

 

경고의 말씀

거기에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위하여 주님의 공생애의 종교 지도자들과 관련이 있는 예수의 꾸짖음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봅시다. 경고의 말씀으로 시작하는 것을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지도자들을 흠잡았을 때 그들은 대체로 방어적일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을 향해서 증오가 증가되었습니다. 결구엔 그들은 사형에 처하도록 그분을 로마 정부로 데려왔으며 그분의 십자가의 못 박음을 위해 사람들을 불러내어 선동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들의 방법은 그들 자신들의 무고함을 밝힘으로서 비판에 대해 반대하고 있었으며, 그들을 꾸짖으시는 예수를 죽이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현명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타락한 인류 안에서 우리는 어떤 비판에 대해서 반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무엇이 현명한지를 말하고 있는데 “생명의 책망을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들 가운데 거하느니라. 훈계를 거절하는 자는 자기 혼을 멸시하는 자이거니와 책망을 듣는 자는 명철을 얻느니라.” (잠15:31-32)고 했습니다.

 

여러분, 나는 지도자들 가운데 문제점들에 관하여 예수의 말씀을 연 채 여지를 남겨두도록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듣는 귀가 있고, 그분께 겸손하게 열고 여지를 남겨 놓는다면 아마도 하나님께서 오늘날 여러분의 봉사와 마음에 관하여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위선의 문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너희에게 지키라고 명하는 것은 지키고 행하되 그들의 행위대로 행하지는 말라. 이는 그들이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아니하며”(마23:2~3)고 하셨습니다. 그 종교 지도자들에게 꾸짖던 같은 현장에서 예수께서 위선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의롭게 보이되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도다.” 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누가복음에서 이 위선을 마귀의 누룩에 비유하기를 너희는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라.”(눅12:1)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은 성경으로 다름 사람들을 교육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무엇을 전해야할지를 훈련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사역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의 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훈련을 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추구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들이 헌신적으로 주기를 요청할 때, 그것을 실행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깨끗한 삶을 살기를 가르치는 동안 여러분은 은밀히 친절하게 대해줘서 죄 안에 있게 합니까?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께 위로가 가득한 삶을 살라고 말할 때 여러분 자신의 마음에서 주님으로부터 영역들을 보유하고 있으라고 하고 있습니까?

 

율법주의

예수께서는 계속하여 “또 무겁고 지기에 힘든 짐들을 묶어 사람들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로도 그 짐들을 옮기려 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마23:4) 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예수께서 지도자들의 율법을 지키려는 경향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은 지도자들은 무리 위에서 “율법”을 아래에 내려놓기를 사랑하며 “하라. 와 하지마라.”라는 많은 말로 그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같은 가르침은 단순하게 무리를 짐을 지워 그들이 지탱할 수 없는 멍에를 지우며, 죄를 범하게 하고 패배를 당함을 느끼게 하여 떠나게 합니다(행15:10). 신약에서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완전하게 해방 받았으며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연합되었습니다(롬7:4, 갈2:19-21). 여러분은 지금 훈육 선생이 있거나 아니면 은혜의 길 안에서 자라도록 무리를 돕는 자이며 그들이 그들의 충분한 생활로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까?(갈3:24~25, 골3:3-4)?

 

상승된 욕망

예수께서 말씀하셨는데 “도리어 그들의 모든 행위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니 곧 성구함의 폭을 넓게 하며 옷단을 큼직하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고 하셨습니다.

 

타락한 사람은 은밀하게 주목받기, 인정받기 , 그리고 명예를 얻기를 사랑합니다. 다른 믿는 이들 주변에 있을 때 여러분은 예배드리기, 기도하기, 금식하거나 그들에게서 주목받고 칭찬받게 되기를 은밀한 움직임으로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본분을 행합니까? 예수께서 그분께서 다시 오실 때 이런 은밀한 행하고 있는 종류의 일은 보상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우리를 경고하시고 계십니다(마6:1~5).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은밀한 것들을 행하지 말아야 하지만 우리의 아버지의 뜻대로 해야 합니다(마6:4,6).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위험한 지도자들은 칭찬받고 높아지려고 하는 욕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의 모임과 회중의 앞에서 특별한 자리에 앉는 것을 포함하여 소중히 여겨지길 바랍니까? 예수께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겸손하여야만하고 높아지지 말아야만 한다고 우리를 가르치셨습니다(눅14:7~11). 우리 안에서 그런 것들이 머리를 쳐들고 대중적인 인정을 위한 욕망이 생길 때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그것을 죽여야만 하고 모든 영광을 그분께 드려야 하며 우리에게는 돌리지 말아야만 합니다.

 

예수께서 위에서 언급한 구절에 따라 지도자들에 관해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시장에서 인사 받는 것과 사람들에게서 랍비라 일컬음 받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랍비라고 불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교사는 한 분이시며, 여러분 모두는 형제들입니다. 땅에서 아무나 여러분의 아버지라 부르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아버지는 하나이시고 그분은 하늘에 계십니다. 또 지도자들로 부르지 마십시오, 지도자도 한분이시고, 즉 그리스도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 가장 큰 이는 여러분의 종이 되어야만 합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높임을 받는 자들은 낮아질 것이고, 낮아진 자들은 높여질 것입니다(마23:6~12).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리스도의 가르치심보다 명쾌하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지도자들은 왜 이 그리스도의 말씀들을 무시하는지와 칭찬의 말과 따르는 형제들 모두 위에서 특별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지위 즉 교구목사, 아버지(신부), 감독, 장로, 또는 목사 등처럼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하는 것을 나에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타락한 사람이 그 안에서 높임을 받으려는 것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마음의 문제가 아닙니까?

 

만일 여러분이 직함을 사용하고 있다면 기꺼이 그것들을 내려놓고 또 주님께 여러분들이 높여짐과 직함들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리시오,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은 형제들에게 종이 되는 실제적인 소망이 있습니까? 성경이 가르치기를 지도자들은 본으로 인도해야만 한다고 합니다(벧전5:3).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겸손함을 전람한 무리를 원한다면 여러분 스스로가 겸손함을 가지십시오(빌2:5~8).

 

물질의 문제

“봉사자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데 어느 쪽이든지 하나를 미워하거나, 다른 하나를 사랑할 것이며, 또 하나를 붙잡거나 다른 하나를 몹시 싫어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물질을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었고 이런 것들을 모 듣고 있었으며, 그들은 주님을 비웃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한 종이 결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이는 그가 이 주인을 미워하고 저 주인을 사랑하거나 혹은 이 주인을 떠받들고 저 주인을 업신여길 것임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탐욕스런 바리새인들도 이 모든 것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거늘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들의 눈앞에서 스스로를 의롭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이는 사람들 가운데서 높게 평가받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이기 때문이니라.”(눅16:13~1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지도자들에게 종종 시험을 받는 것은 돈인 것 같습니다. 사역자는 오직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아니면 돈을 사랑하는 자들입니까?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사역자들입니까? 아니면 재정이 곤란해 사리사욕에 빠져있습니까?

 

장로들에게 베드로의 훈계로 말하기를 너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고 감독하되 억지로 하지 말고 자진해서 하며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기꺼운 마음으로 하며”(벧전5:2)고 하였습니다.

 

“탐욕스런 이득”에 대한 그리스어는 “아이스크로케르도스”로 쓸 수 있습니다{Strong's number 147). 이것은 “부끄러운 또는 비열한(순수하게 되는 것에 반대하는)”을 의미하는 첫째부분 "aischro"와 “이득”을 의미하는 둘째부분 "kerdos"가 합성된 단어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재정적인 이득을 언급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베드로전서 5:2의 의미하는 지방 양떼의 목양하는 것은 어떤 것들을 할 때 기꺼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해야만 하고 이득의 불순한 목적으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디도는 어떤 이들을 “탐욕스러운 이득의 목적”으로 단순하게 가르치는 선생들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딛1:11).

 

발람의 본

이 시점에서 우리는 발람의 경우를 잠시 동안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교회에서 거짓교사들과 선지자들의 말하고 있는 것을 “이들이 바른 길을 저버리고 보솔(Beor)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며 길을 잃었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였으나”(벧후2:15)진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성경은 분명하게 발람은 돈을 사랑함으로 문제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벧후2:15)

 

민수기22장은 발람의 이야기로 자신을 시험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어느 종들의 시험하는 것에 관하여 교훈하고 있습니다. 발락은 이스라엘의 자손을 저주하도록 발람에게 요구했습니다. 발람을 유혹할 목적으로 발락은 그를 고용하기 위해 발람의 손에 돈을 주러 장로들을 보냈습니다(민22:7). 13절은 발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장로들을 거절했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유혹이 왔습니다. 이때에는 발락은 더 유명하고 더 많은 지도자들을 보냈는데 그들은 그를 풍요로움과 명예로움을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따라 곧 그들을 거절하는 대신 발람은 그들을 안으로 들이고 그가 말하기를 그것에 관해 좀 더 주님께 말씀드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물질적인 이득과 인정을 위해 자기의 욕망을 만족시키려고 하나님의 또 다른 응답을 비밀리에 받기를 원했다고 보입니다.

 

어떤 성경 인도자들은 그가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했다고 보여서 발람이 잘못했다는 것에 놀랄지 모르겠습니다(민22:18~19).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발람의 마음을 보고 계셨는데 이것은 그를 시험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성경에 기록하고 있는데 비록 하나님께서 가라고 허락하셨다(민22:20) 할지라도 “하나님의 진노는 그가 갔기 때문에 격해지셨다”(민22:22)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발람은 물질적인 이득과 인정을 위해서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기꺼이 타협했다고 보셨던 것입니다. 그가 이미 하나님의 길과 하나님의 명령을 알았을 때 자신의 만족의 가능성을 끝까지 추구했기 때문에 발람과 함께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여행 중이던 발람에게 보라, 네 길이 내 앞에 비뚤어졌으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선포하였습니다(민22:32b). 발람의 경우의 교훈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하기보다 더 돈과 인정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참 목자는 돈을 위해 일하는 사람 같지 않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주거니와 삯군은 목자가 아니요, 양들도 자기 것이 아니므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도망하나니 이리가 양들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그가 도망하는 것은 삯군인 까닭에 양들을 돌보지 아니하기 때문이라.”(요10:11~13).

 

그리스도인 지도자는 스스로에게 “나는 삯군인가, 아니면 목자인가?”를 물어야만 합니다. 삯군은 거기에 문제가 생길 때 거기서 떠날 뿐만 아니라 돈이 없으면 떠날 것입니다. 다른 무리에게 가기 위해 무리를 떠나는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가는 곳에 돈이 더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는 질문은 만일 여러분이 봉사를 위해 돈을 받지 못한다면 무리를 목양하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하는 것이 적어도 부분적으로 돈 때문에 합니까?

 

신약의 본

신약의 본과 초기 교회사에 따르면 지방 장로들이 “목사들”이 되는 직업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사도바울은 무리 가운데서 가난한 자들을 돕는 목적으로 직업을 만들어서 열심히 일하는 지방 장로들을 실제로 격려했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20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서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말했습니다.“내가 어떤 사람의 금이나 은이나 옷을 탐내지 아니하였고 참으로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및 나와 함께한 자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마련하여 너희에게 모든 것을 보여 주었노니 너희가 마땅히 이렇게 수고하여 약한 자들을 도와 주고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노라,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20:33~35).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종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마음들을 시험하시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돈의 이 문제를 우리의 마음에 처리하도록 하는 은혜를 우리에게 주실 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시험을 통과한 무리의 목양자들은 그분의 심판대 보좌에서 감추어진 것들을 드러내실 것입니다(고후5:10, 벧전5:1~4). 우리는 하나님과 맘몬(부유) 둘 다 섬길 수 없습니다.

 

비록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사역을 위한 은사들을 받았을지 모르지만(갈6:6,딤전5:17) 인도자직분 안에서 그들의 봉사는 결코 그것을 의존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방장로로서 우리의 봉사는 하나님의 목양하는 것과 무리에게 먹이를 주는데 (만일 우리가 진실로 은사를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부르심을 실행하기 위해 우리의 믿음에 의존해야만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다시 두번째 그에게 이르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그분께 이르되, 주여,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매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 양들을 먹이라, 하시고”(요21:16)고 말씀하셨습니다.

 

전통의 문제

“그분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에 대하여 잘 대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자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그러나 그들이 사람들의 명령들을 교리로 가르치니 내게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고 사람들의 전통을 지키고 있으니 곧 단지나 잔을 씻는 것과 너희가 행하는 바와 같은 다른 많은 일들이라. 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명령을 잘 저버리는도다. 이는 모세는 이르기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누구든지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지니라, 하였거늘 너희는 이르기를, 사람이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무엇이든 내가 드려 부모님을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예물이 되었나이다 하기만 하면 그는 의무를 면제받으리라, 하고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위하여 그가 무엇이든 행하는 것을 너희가 더 이상 허락하지 아니하여 너희의 전해 내려온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가 되게 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기 때문이니라, 하시더라.” (막7:6~13)

 

예수께서 유대교지도자들에게 그들이 전통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았기 때문에 강하게 비난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우리가 기독교의 우리의 운동 안에서 얼마나 많이 영향을 깨달을 수조차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관찰에 의하면 그것은 우리가 하는 일 대부분이 퍼져있습니다.

여기에서의 교훈은 만일 우리가 그분을 따르는 지도자가 된다면 예수께로부터 배워야만 합니다. 그분은 전통을 위하여 하나님의 방법과 결코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전통에 관해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것에 관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력하게 하는 규례를 바탕으로 한 전통과 가르침을 실행하는 방법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의 교훈에 의해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전통에 바탕으로 된 것을 포함하여)은 헛된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것은 무의미한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통은 하나님의 말씀을 반대하고 하나님의 온전한 예배를 반대한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을 지지하는 것은 전통들을 드러내므로 주님 안에서 넉넉히 담대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성직자와 평신도 체계는 1세기 후에 서서히 발전하여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신약선경에서는 성직적인 “계급” 또는 성직자 계급제도와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모든 신약의 믿는 이들은 하나님께 속한 제사장들이요(벧전2:5), 모든 이들이 하나님께 직접 참여하게 됩니다(딤전2:5, 히10:19~22).

 

교회 안에는 지도자들 즉 지방의 장로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통치하는 계급과 다른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는 계급으로 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교육과 그들의 생활의 본으로서 인도하고 있습니다(히13:7, 벧전5:3). 그들은 높여지려는 계급이 아니라 단지 형제들입니다(마23:6~12)

 

마침내 로마카돌릭 교회의 알맞은 성직계급 체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직자와 평신도 체계로 어떻게 발전되었는지 알기 위해서 교회사를 읽어 보십시오. 나는 성직자와 평신도 체계를 더 안내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한 경영원리”라고 표제를 단 소책자를 참고하라고 하고 싶습니다. 기독교계의 또 다른 전통은 예수를 기억하는 특별한 축제일의 기념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위한 특별한 축제일에 관하여 성경에는 말씀이 언급이 없습니다. 그분은 주님의 만찬으로서 그분을 기억하도록 우리를 가르치셨습니다(눅22:19).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마음 안에 믿도록 하는 방법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개별적으로 다른 사람들 보다 위에서 특별히 하루를 귀하게 여기는 자유를 갖습니다(롬 14:5).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예수를 위한 특별한 날에 관한 사실을 알기 원한다면 여러분은 그것들의 역사적인 유래를 연구해야합니다. 이 축제일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왔습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고안(지금의 전통도)으로부터 왔습니까? 비성경적인 관습으로 만들어 낸 것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는 여로보암의 경우가 있습니다(왕상12:25~13:6). 여로보암은 예배의 장소, 예배 방법, 예배의 목적, 제사장직과 성직을 주는 특별한 날 즉 종교적인 축제일들을 바꿨습니다.

 

나의 요점은 축제일을 문제를 삼지 않습니다. 나는 틀림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들고 함께 교제하는 것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인도자들이 전통의 문제에 관해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분의 생애의 지도자들에게 거친 말씀들을 하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력하게 했던 전통을 따라 가르치고 관습처럼 기꺼이 행하셨습니다. 형제들이여, 여러분들은 어떻게 전통을 다루시겠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임을 기억해야만 하는데 무리를 가르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심판 보좌에서 더 엄격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약3:1).

 

만일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시인하기로 결정하고 전통을 폭로한다면 그것이 아마도 어떤 것들을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전통은 대중적입니다. 반대하는 것은 인기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지자들과 명예로운 지위를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격려가 됩니다. 예수를 따르는 길은 인기가 있거나 넓은 길이 아닙니다. 그것은 협착한 길입니다(마7:13~14).

 

나는 몇 가지 전통의 본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전통의 많은 다른 문제들이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행하고 가르치는 것 모두 전통의 이 문제를 고려하라고 여러분들을 재촉합니다.

 

마음의 문제

마지막으로 내가 마가복음 7장의 인용을 빠뜨린 예수의 몇 가지 말씀들을 인용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에 대하여 잘 대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자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그러나 그들이 사람들의 명령들을 교리로 가르치니 내게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고 사람들의 전통을 지키고 있으니 곧 단지나 잔을 씻는 것과 너희가 행하는 바와 같은 다른 많은 일들이라.“(막7:6~8).

 

보십시오. 전통에 방해되는 실제적인 문제와 사람들의 교리들을 가르치는 것은 마음 문제입니다. 우리의 입술로 주님을 찬양 드리는 것은 가능하지만 우리의 마음에는 그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지도자들 마음에 온 마음으로 그분을 추구하고 하나님으로 그들의 마음에 충만 되도록 시작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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