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ethren/연(輦)모임 메시지

제자들을 부르심

Hernhut 2013. 2. 16. 21:32

 

제자들을 부르심

by Hernhut Sung

 

“*큰 무리가 예수님과 함께 갈 때에 그분께서 돌아서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나 아내나 자녀나 형제나 자매나 참으로 자기 생명까지도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또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하면 자기가 가진 것이 그것을 완성하기에 충분한지 먼저 앉아서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하지 아니하여 그 기초만 놓은 채 완성하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그를 조롱하기 시작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짓는 일을 시작만 하고 완성하지는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떤 왕이 다른 왕과 전쟁을 하려 할 때에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만 명으로 당해낼 수 있을지 먼저 앉아서 잘 생각해 보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당해내지 못할 터이면 다른 왕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의 조건을 구할 것이니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것을 맛내게 하리요? *그것이 땅에도 거름더미에도 적합하지 아니하므로 사람들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14:25-35)

 

“*내가 땅에 화평을 보내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보내러 왔노라. *이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를, 딸이 어머니를,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여 불화하게 하려고 내가 왔기 때문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사람들이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내 뒤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생명을 찾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로 인하여 자기 생명을 잃는 자는 찾으리라.”(10:34~39)

 

우리 주님 예수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도시에서 도시로, 마을에서 마을로 여행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시러 오셨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음으로서 아는 것처럼 주님을 둘러싸고 거대한 무리들이 모였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사역하신 후 그분은 그들을 묵살하셨고, 가끔 그분 자신은 그들을 떠나셨습니다. 보통 우리가 군중을 모이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와 함께 그들을 계속 있게 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이런 실행은 아주 이상한 일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군중들이 모였을 때 그분은 그들을 묵살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께 듣기 위해 왔던 많은 무리들에 대해 요한복음 6장에 있는 이야길 기억할 것입니다. 주님은 5,000명을 먹이시려고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사용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먹이신 후에 주님은 그들이 그분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에 그들을 물리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역하는 것과 다릅니다. 우리의 생각은 많은 사람을 수용하고 현대적인 시설을 요구하기 때문에 건물을 짓고 그곳에서 계속해서 모이게 하려고 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하루에 여러 번 나누어 모이고 그를 담당하는 목사들과 전도자들이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순전한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생각하시는 교회는 흩어져 모이는 것입니다. 2~3명이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서로 말하고 듣는 것을 교회라 생각하십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일 것이요,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너희에게 다시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어 주시리라. *이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그들 한가운데 있기 때문이니라.”(18:18~20)

 

거기에 모여 있던 자들과 제자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의 먹는 문제를 해결하시는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사실상 주님은 주님의 제자들은 이와 같은 군중들을 보는 것이 너무 행복하지 않아서 빠져 나가려고 했었기 때문에 자신의 제자들을 먼저 설득하셔야 했습니다. 그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왕이 되셨더라면 아주 기뻤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먼저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셨고, 그런 후에 주님은 군중들을 떨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다음 날 군중들은 다른 편에 계신 주님을 만나서 주인이시여, 어떻게 여기에 계십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너희가 음식을 위해 왔구나. 소멸될 것을 추구하지 말고, 영원한 것을 추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요, 그분께서 나의 육체를 먹고, 나의 피를 마시는 자가 영원한 생명을 갖고, 나는 마지막 날에 그를 일으켜 세우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그 말을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말로 사람들이 주님께 오기 시작했을 때 주님은 그들을 떠나도록 하시기 위해서 어려운 말을 하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행하시고 어려운 말씀을 하신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심지어 많은 제자들은 이 말씀이 너무 어렵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 예수를 정말 떠났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갈망하신다.

우리 주 예수께서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시러 세상에 오셨다 할지라도 그분의 목적이 비단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만이 아니십니다. 그분의 목적은 주님 안에서 믿는 모든 자들이 그분을 따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믿는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제자들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주님께서는 군중들이 따르는 것이 아니요, 선택된 자들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은 양적(量的)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요, 질적(質的)인 것을 찾으십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찾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는 자신을 따르려고 주님 안에서 믿는 사람들을 원하십니다. 예수는 자신의 제자가 되려고 그분 안에서 믿는 자들을 원하십니다. 주님 안에서 믿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그분께서 진실로 갈망하시는 것입니다.

 

원칙에 따라서 주님 안에서 믿는 자들은 그분의 원칙이 되어야 합니다. 믿는 자들과 제자들 사이에 차이가 없어야 합니다. 믿는 자들이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어떻게 믿을 수 있나요? 주님께 우리가 훈련받을 수 없나요? 믿고, 훈련받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상하게도 주 예수를 믿는 자들은 많지만 주님을 따르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제자들이 아닙니다. 이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런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땅에 계셨을 때도 일어났고, 수세기가 지나서도 일어났고, 지금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는 이들은 많습니다. 구원 받기 위해서 자신들의 구세주로 그분을 인정하는 자들이지만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전체적으로 주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훈련받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는 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만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주 예수를 믿었을 때 여러분의 구세주로 그분을 인정하셨습니까? 아니면 그분 안에서 믿었을 때 여러분의 주님으로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께 온 생명을 복종하셨습니까? 사도 바울의 삶을 보십시오.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 부활하신 주님이 바울을 만났을 때 그가 한 첫 번째 질문에서 주님, 당신은 누구시죠?”라고 물었습니다.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요? 그것은 그가 그분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나사렛 예수께서 부활하신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핍박한 분이 실제로 자신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 당신이 누구시지요?”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에서 바울은 주님, 제가 무엇 하기를 원하십니까?”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바울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었던 순간이 그분께 그의 생명을 복종했던 때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곧 훈련되었습니다. 그것이 바울의 체험이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전형적인 체험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믿는 자들과 제자 됨의 순간을 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 예수를 믿는 순간이 우리가 구원받은 순간입니다. 그분의 은혜가 우리의 생활 속에서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훈련받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제자가 되는 조건

이제 우리는 이 원칙을 내려놓고 특별한 경우를 볼 것입니다. 어느 날 큰 무리들이 주님을 에워쌌습니다. 우리 주님은 둘러보시고 어떤 사람이든 나를 따라 오려거든 너희 아버지, 어머니, 아내, 아이들, 형제들과 자매들을 심지어 자기 생명까지도 미워하지 아니하면 그런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14:26). 중국어 성경에서는 이 구절을 너희가 미워하지 않으면....”으로 조금 부드럽게 표현했습니다. 중국어 성경은 若不愛我勝過愛/ 루오 뿌 아이 워 슁꾸오 아이.....”로 표현했습니다. 이는 미워하다라는 단어가 우리 생각 속에 아주 나쁜 의미를 갖기 때문에 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피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어 성경은 “~보다 더 사랑하다.”라는 말로 부드럽게 사용한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사실 “....너희가 너희 아버지, 어머니, 아내, 아이들, 형제들과 자매들을 심지어 자기 생명까지도 미워하지 아니하면 그런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이런 단어를 인정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오늘날 여러분에게 이런 말씀을 하셔야 한다면 여러분은 그들을 외면할까요? 우리는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불합리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를 공경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나요? 성경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주님의 제자훈련과 교육으로 자녀들을 일으키라고 말하지 않는가요? 우리가 우리 형제, 자매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것이 아닌가요?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다치게 하는 것이 아닌가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잖아요?”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이와 같은 조건을 왜 내놓으시는 것입니까? 애당초 주님은 제자훈련을 위해 조건을 내놓으시고 그 조건들이 절대적인 원칙으로 정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미워한다는 단어를 들을 때 그 단어가 지니고 있는 나쁜 의미이기 때문에 그 단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실 미워하다.”라는 말은 중립적인 말입니다. “사랑하다.”가 우리의 감정표현인 것처럼 미워하다.”도 우리의 감정표현 중에 하나입니다. “미워하다.”는 중립적인 단어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어떻게, 무엇을 미워하는지에 달려있습니다. 사랑하는 것도 같습니다. 누구를, 어떻게, 무엇을 사랑하는지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사람을 사랑하고, 잘못된 방식과 잘못된 것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진실로 문제인 것입니다. “미워하다.”와도 들어맞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미워하는지에 달려있습니다. 사실상 우리가 미워하는 방식을 모른다면 우리는 진실로 사랑하는 방법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방법을 아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방법도 아십니다. , 우리가 미워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사랑하는 방법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미워할 필요가 있는 것을 미워하고, 사랑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을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미워하다.”라는 말을 들을 때 즉시 여러분의 생각을 닫지 마십시오. 무엇을 미워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어떻게 미워하고 무슨 이유로 미워하는지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이든 나를 따라 오려거든 너희 아버지, 어머니, 아내, 아이들, 형제들과 자매들을 심지어 자기 생명까지도 미워하지 아니하면 그런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제자훈련을 위한 조건입니다. 그것은 완전합니다.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 아내, 아이들, 형제들과 자매들을 심지어 자기 생명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운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기 위해서 제일 가까운 관계조차도 미워해야 한다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온 세상에서 누가 이와 같은 요구사항을 세우실 권리를 가지고 계신가요? 그와 같은 요구사항을 세우실 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와 같은 요구사항을 세울 사람이 있다면 그는 미치광이거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맞는 말 아닙니까? 여러분에게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은 요구사항을 세운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제외하고는 이와 같은 요구를 할 권리를 가진 자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와 같은 요구를 하실 권리를 가지신 유일한 분이 예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우리 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것과 함께 유사한 구절들을 연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땅에 화평을 보내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보내러 왔노라. *이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를, 딸이 어머니를,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여 불화하게 하려고 내가 왔기 때문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사람들이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내 뒤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생명을 찾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로 인하여 자기 생명을 잃는 자는 찾으리라.”(10:34~39)

 

우리는 여기서 아주 이상한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그리스도 즉 화평의 왕이시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화평을 세우러 오시고 우리가 하나님과의 화평을 가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화평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땅에 화평을 보내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보내러 왔노라. *이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를, 딸이 어머니를,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여 불화하게 하려고 내가 왔기 때문이니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 안으로 오셨을 때 위기가 창조되고, 최악이 되었습니다. 생명 안으로 그리스도께서 오심이 어떤 빛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생명 안으로 오실 때 위기가 창조됩니다. 그 위기는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곳에 우리를 넣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선택해 따르겠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옛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택하십니까? 옛 길을 걸으려고 하십니까? 종전과 같이 유지하시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은 이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새로운 방식으로 주님을 따르겠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 이유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주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우리가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를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부모를 사랑하는 것 위에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그것은 가치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부모는 우리 사랑의 가치가 있습니다. 부모님들은 우리를 사랑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사랑의 가치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내가 너의 부모보다 더 가치가 있는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가치의 문제입니다.

 

그리스도께 합당하게 되는 것

우리는 진실로 우리 주 예수에 대한 가치를 보고 있습니까? 주님은 아버지의 품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독생자시오, 이제 아버지의 품을 떠나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한 사람이 되시기 위해 이 세상으로 오셨고, 죄인들 가운데서 사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입증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마침내 예수께서 그분 자신 위에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는 우리를 위해 그분 자신의 피를 흘리셨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씨앗과 같이 땅에 떨어져서 죽으셨습니다. 많은 씨앗이 싹을 틔우고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생명을 받아들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님께서 이 온 세상에서 어떤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가치가 있으십니까?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너희는 나의 합당함이 보이지 않도다. 너희는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나보다 더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느 정도 그것이 미워하다.”라는 단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부모, 부부, 아이들, 형제와 자매들, 심지어 여러분의 생명이 주 예수와 반대되고, 논쟁이 있고, 그들이 서로 불화할 때 여러분을 미워하는 이는 누구며, 사랑하는 이는 누구입니까? 주님께서 이 길을 가는 우리를 원하시고 우리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다른 길을 가는 우리를 원하며, 심지어 우리 자신이 다른 길을 가기를 원할 때 누가 우리를 미워하고 누가 우리를 사랑할까요? 우리가 자신을 미워하고 주님을 사랑하나요? 아니면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주님을 미워하나요? 이것은 비교의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실제로 요구하시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제련하시려는 것이요, 미움을 제련하시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실제로 미워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할지 모릅니다. 그것은 우리의 감정을 제련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주 예수와 같아지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신격에서는 예수님과 같아질 수 없지요. 신격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본성과 생명 안에서는 같아집니다. 기독교회에서는 이런 말을 닮는다.”라는 말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일리가 있지만 분명하지 않습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분에 대한 것을 배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성품을 우리 자신이 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는 것이요,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면 우리는 미워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분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에 관한 모든 것을 훈련하는 것이지만 그 조건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완전한 굴복이 없고, 완전한 구별됨이 없고, 완전한 포기가 없다면 우리는 주님에 대한 가치가 없고, 또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완전한 굴복, 구별됨, 그리고 포기로 제자가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진실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지만 수시로 우리는 가치가 없는 제자가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자신의 일을 하고,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완전한 굴복과 포기 없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심을 이해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자신의 십자가를 수행하지 않고 나를 따르는 자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여기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우리와 그리고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주님의 생각보다 다른 생각을 갖기 시작할 때입니다. 나는 많은 경우에 이런 체험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부르심을 받고서 불모지와 같았던 가정에서 가장 가깝다는 가족으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 때문에 청년시절에 집에서 쫓겨나 방랑생활을 수년간 했습니다. 주님은 이 길을 가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 우리 육체는 다른 길을 가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사랑하는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 길보다 다른 길을 우리가 가기를 원할 때 십자가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오랫동안 나의 십자가를 졌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할 때마다 그 십자가는 가벼워졌습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산출되는 많은 십자가가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수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는 주님 자신이 자신의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분 자신 모두를 십자가 위에 못 박히시기까지 십자가의 길에서 걸으셨습니다. 우리 모두 다른 십자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의 십자가를 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후에야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건이 절대적인지를 찾습니다. 내가 여러분과 나누기를 갈망하는 것은 여러분과 내가 여러 해 동안 주님을 믿어왔고, 또 주님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해 왔지만 진실로 우리가 주님의 제자입니까?”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주님께서 내려놓은 조건을 채워가지고 있습니까?

 

망대를 건축하기

그런 후 주님은 2가지 묘사를 사용하셨습니다. 주님은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하면 자기가 가진 것이 그것을 완성하기에 충분한지 먼저 앉아서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14:28) 말씀하셨습니다. 망대가 무엇입니까? 망대는 밖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망대는 멀리서 볼 수 있도록 높게 건축된 초소입니다. 그러므로 망대는 사실상 간증과 증거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의 증거를 맡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망대를 세우기를 원한다면 주님께서는 그 망대로 들어가기를 서두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이 흥분되고 있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고 손을 들 때 어떤 분위기 아래에서 감정적인 동요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주님은 아주 심각한 것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행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증거와 간증을 약속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건축하고 있는 것은 망대입니다. 우리는 앉아서 진정해야 합니다. 망대를 건축하는 것이 언제 끝이 날지 값을 따져보십시오. 우리가 기초를 놓고 망대를 세울 수 없다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서 우리를 비웃을 것입니다. 그가 시작은 했지만 끝내지 못하는구나.”" 다른 말로 말하면 거기에는 간증이나 증거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주님께 치욕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곳으로 들어가기를 서두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쉽게 결정하고 쉽게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집에 가서 진정시키고 또 얼마나 드는지 계산해 보십시오. 우리가 기꺼이 모든 것이 드리려고 한다면 값이 모든 것임을 보십시오. 여러분은 망대를 건축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기꺼이 사용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어떤 것을 남겨두고서 망대를 건축하기 원하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기초를 놓을 수 있지만 그것을 끝낼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해본 적이 있나요? 여러분이 주 예수님을 믿고서 여러분의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운데 진실로 앉아서 값을 계산한 적이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것은 값이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의 제자가 된다는 것에는 값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앉아서 값을 계산해 본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앉아서 값을 계산하기 시작할 때 여러분의 대부분은 값이 너무 비싸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하나님의 적은 여러분에게 풍부한 상상력으로 모든 가격을 제시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값을 계산하면 할수록 더 비싸지게 될 것입니다. 적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으로부터 방해하고 막기 위해서 갖은 방법을 다 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그영(the Spirit)께서 우리의 이해와 지식을 여시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가치를 드러내실 때 너무 비싼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이 주님을 위해서는 너무 비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실상 우리가 비싸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얻음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상 우리들의 그리스도를 얻음으로부터 막습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은 간증했습니다. 그는 아주 높은 자신의 족보를 평가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었고 유대인으로서 정회원이었습니다. 그는 베냐민지파의 사람이었고,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또 율법에 대해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해 매우 귀하게 계산했지만 주께서 그를 만나시고,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의 뛰어나심을 보았을 때 그가 자신에 대한 가격을 생각한 것이 사실상 그를 멈추게 했던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모든 것이 해가 되었고, 해 뿐만 아니라 찌꺼기요, 배설물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값을 계산할 때 우리는 너무 비싸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주님에 대한 가치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에 대한 비젼을 가지고 있다면 비싼 가격이 아닙니다. 사실상 주님은 해에서 우리를 구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큰 것을 얻고,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실제로 채울 수 있습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망대를 건축하는 것이요, 예수에 대한 간증과 증거를 드러내는 것이요, 예수께서 모든 것 위에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요, 또 예수께서 모든 것에 가장 높으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건축하는 것에 대한 증거요, 간증입니다. 주님은 우리 자신, 우리의 부모, 아내나 남편, 아이들, 형제와 자매들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으십니다. 예수는 모든 것 위에 계십니다. 그것은 예수에 대한 증거요, 간증입니다.

 

전쟁하러 가기

그런 후 주님은 또 다른 비유를 드셨습니다. 주님은 왕이 전쟁하러 가고 있다면....”하고 말씀하십니다. 주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전쟁하러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서 벌어지는 영적전쟁을 하러 가고 있습니다. 예배를 받으실 만한 분이 누구십니까? 누가 섬김을 받으셔야 합니까? 제자가 되는 것은 이 질문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전쟁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싸움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계산을 하고 산출해야 합니다. 적은 20,000이요, 우리는 적을 대항하여 싸우는데 단지 10,000명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10,000명의 군사만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10,000명의 군사들만을 사용하기 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두기 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군사들을 모두를 보내기 원치 않습니다. 이런 경우라면 결국 싸우지 마십시오. 우리가 패할 것이기 때문에 평화를 요구하십시오. 우리는 우리 모두를 기꺼이 주고 있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너희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것처럼 생각하면 우리는 결국 싸울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주장하면 우리가 주님을 위해 모든 것들을 사용한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는 이미 패배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을 위해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나는, 나를, 나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이 당신의 것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여러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예수께 받은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무엇이 여러분 것입니까? 우리는 벌거벗고 이 땅에 왔습니다. 그리고 벌거벗고 떠납니다. 우리의 생명조차도 주님께 받은 것입니다. 특히 여러분의 구원도 여러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정말로 우리의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우리의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지체요, 청지기일 뿐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이 주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볼 때,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포기합니다. 여러분은 그 이면의 이유를 봅니까? 우리가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고는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 우리 주님께서 디베랴 바닷가를 걷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물을 던지고 베드로와 안드레를 보았습니다. 주님은 나를 따라 오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물을 던지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분은 조금 더 걸으셨고, 그물을 깁고 있는 세배대의 아들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나를 따라오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물, 아버지, 배를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마태는 세관에 있었습니다. 그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세관의 직업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주님을 따랐던 모든 이들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베드로는 배를 가졌습니까? 맞습니다. 집이 있습니까? 그는 집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족이 있습니까? 맞습니다. 그는 가족이 있습니다. 심지어 그의 집에 장모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여러분의 마음이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주님께서 모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주님께서 그분의 것이기에 그런 것을 다 가지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것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고는 예수의 제자들이 될 수 없습니다. 제자가 되는 것은 절대적입니다. 우리가 제자이라는 것 역시 우리는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것 역시 우리가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망대를 건축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싸우고 있습니까?

 

 

맛을 잃은 소금

주님은 자신의 말씀을 맺으시면서 소금이 좋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의 소금은 매우 중요합니다. 레위기 2:13절에서 네 모든 음식 헌물의 봉헌물에 소금을 칠 것이니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음식 헌물에서 빼지 못할지니 너는 네 모든 헌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영원함을 의미합니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5:13). 주님께서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누구에게 한 것입니까? 제자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면 우리의 생명은 특별한 맛을 냅니다. 주님은 너희는 특별하고 각별한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기이하고 놀랍고 각별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새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과 다른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부패를 방지시키는 소금이 되십니다. 우리가 어떠한 것에 적당한 소금을 넣을 때를 압니다. 맛이 없는 음식에 우리가 소금을 넣을 때 맛을 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독특한 향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그것을 알지만 소금으로 간을 맞출 수 없습니다. 소금이 어떻게 해서 간을 맞출 수 없을까요? 우리가 소금을 희석시키고, 희석시키고 변질시키므로 어떤 부분에서 완전히 희석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소금의 맛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가 세상의 방식을 따르고, 우리의 육체의 방식을 따르면 우리가 희석되는 것이요, 소금이 맛을 잃을 때까지 희석되고 희석된다는 의미입니다. 일이 생길 때 우리는 희석된 소금으로 무엇을 할까요? 우리는 비료로 들에 소금을 넣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쓰레기장에 맛을 잃은 소금을 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소금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사실 소금의 맛을 잃은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다만 밖에 버려집니다. 여러분은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압니까? 땅은 왕국을 대표합니다. 우리가 소금의 맛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겠지만 우리가 우리의 특별한 맛을 잃어버리면 주님은 쓰레기장에 우리를 던져버려질 것입니다. 이것은 쓰레기장이 믿는 이들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자들과 그분은 무엇을 하십니까? 우리는 바깥 어두움이 있는 왕국 밖으로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것으로 그분의 말씀을 끝내셨습니다. 주님은 부르시고 계십니다. 귀 있는 자, 듣는 자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귀가 있고 들을 수 있으면 귀 기울이십시오. 우리는 지금부터 새로운 시작을 가지십시오. 우리는 주님께 완전하게 약속된 사람들이 되십시오. 우리는 모든 방식으로 주님을 따를 것입니다. 어린양이 어디에 계시든 우리는 갑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가치가 있으신 분이시라는 것을 알았고 이미 계산했고, 값을 계산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메시지는 2013년 2월 8~12일까지 연합 연모임에서 전달된 메시지를 요약한 것입니다. 다음 다음 연합 연모임은 4월~5월 사이에 안면도에서 가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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