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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기쁨과 행복 사이엔 어떤 차이가 있는가?

Hernhut 2015. 1. 17. 12:57

 

형제, 그리스도인 생활을 하는데 기쁨과 행복의 차이가 뭔가요?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것은 행복인가요? 아니면 기쁨인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나요? 아니면 기뻐하기를 원하나요?”라고 윤덕형제 외 몇 명의 성도들이 질문을 해왔다.

 

 행복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잘 사는 것(웰빙), 기뻐할 수 있거나 만족할 수 있는 체험을 말한다. 우리의 기쁨으로부터 오는 기뻐하다라는 단어의 정의는 환희(歡喜)를 느끼다, 만열(滿悅)을 느끼다, 환영하거나 반가워하는 것이다. 번역에 따르면 성경은 행복하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약 30번 정도 나오고, “기쁨”, “기뻐하다300번 이상 나타난다. 우리가 몇 구절을 찾아본다면 우리가 기쁨이 행복과 왜 다른지를 이해하는데 도울 것이다.

 

창세기 30:1~13절은 한 남편 야곱을 두고 경쟁하는 두 자매 라헬과 레아의 이야기가 나온다. 두 여인은 남편 야곱을 기쁘게 하려고 남자 아이들을 더 갖으려고 노력한다. 심지어 더 자식을 임신하려고 자신들의 여종들을 사용한다. 레아의 여종 실바는 야곱의 둘째 아들을 낳았다. 창세기 30:13절을 읽어 보자. “레아가 이르되, 나는 행복한 자니 딸들이 나를 가리켜 복된 자라 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아셀이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아샤르ashar를 어근으로 하는 히브리어에서 나온다. 그 이름의 의미는 복되다, 권리를 정하다를 의미한다. 우리는 또 신명기 24:5절에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찾을 수 있다.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취하였거든 전쟁에 나가지 말 것이요, 무슨 일이든지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오직 그는 한 해 동안 집에서 자유롭게 거하며 자기가 취한 아내를 즐겁게(행복하게) 할지니라.”

 

기쁨이라는 단어는 카라chara를 어근으로 하는 헬라어에서 나온다. “카라chara의 의미는 극도로 기뻐하게 되는 것이다. 야고보서 1:2절은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다 기쁨으로 여기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떻게 어려움과 시련을 겪는 것을 기쁨으로 여길 수 있는가? 야고보서 1:3~4절은 우리에게 그 단서 하나를 준다. “너희 믿음의 단련이 인내를 이루는 줄 너희가 아느니라. *오직 인내를 완전히 이루라. 이것은 너희가 완전하고 완벽하여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깊고, 끊임없는 기쁨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우리 믿음의 성숙이 강화되어 시련의 인내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행복은 잠깐 동안의 것이 되고, 환경들과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일시적인 요소에 의지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기쁨은 주님 안에 있는 우리의 믿음과 마찬가지로 내적인 요소에서 오는 참된 만족이다. 참된 기쁨은 영원한 것이다. 참된 기쁨은 환경에 의지하지 않는다. 빌립보서는 기쁨과 행복사이를 가장 크게 연구하고 있다. 로마 감옥에 있을 때 사도 바울에 의해 쓰인 이 빌립보서는 기쁨, 기뻐하다, 기뻐하는등의 단어가 16번 사용한다. 우리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참된 만족을 갖는 방법을 가르친다. 사슬에 매여 있고, 자신의 삶이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던 바울은 자신의 믿음과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신뢰함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는 또 고통 가운데서 자신의 모든 관점이 바뀐 것을 말한다. 빌립보서 1:12~24절에서 바울은 모든 로마사람들이 그로부터 복음을 듣게 되어 로마전역에 복음이 확산된 것이 2년간의 투옥 때문이었다고 말한다(28:30). 18절을 읽어보자. 그러면 무엇이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치레로 하든지 진실로 하든지 모든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선포되시나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 참으로 기뻐하리라.”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화하시는 것을 아는 평화를 갖도록 계속해서 격려한다(4:13). 오직 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영광 가운데서 자신의 부요하심에 따라 너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리라.”(4:19)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 자신의 외적인 것을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행복이 헛된 것이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참된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우리의 교제를 근거로 삼기 때문에 영원하다고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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