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음료/복음칼럼

성령의 다스림

Hernhut 2014. 12. 1. 19:59

 

룻기 4장에서 우리 주님은 그분의 영광스런 뜻을 이루시기 위해 두 가지 중요한 것을 완료하셔야 합니다. 그것들은 룻에게 한 보아스의 약속입니다. 보아스는 나오미의 아주 가까운 친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모든 상속을 구속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보아스가 룻과 결혼을 했었다면 그는 상속과 사람 둘 다 구속해야 했습니다. 구속의 과정은 아주 중요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묘사하는데 그림을 사용합니다. 보아스의 마음에는 더 가까운 친척, 구속을 행사하기 위한 더 큰 우선순위가 있었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 사람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았고, 친척이 있었다고만 말했습니다. 아주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이야기를 통해 영적인 문제를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친척이 율법의 예표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주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 구약성경 시대는 율법의 시대라고 불렸습니다. 은혜의 시대는 우리 주님과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먼저 왔고, 그리스도께서 나중에 왔습니다. 첫 만남은 가장 가까운 친척, 율법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먼저 율법의 이슈를 풀어야 했기 때문에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율법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요구이기 때문에 그 큰 기능이 있음을 압니다.

 

하지만 이 의로운 요구는 사람의 죄만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를 고발합니다. 사람이 율법 아래에서 살 때 그는 아주 약해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를 약하게 느끼도록 할 수밖에 없고, 우리를 구속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성경에서 율법 아래에 사람을 두셨습니까? 율법은 타락한 사람이 너무 약하고, 너무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율법은 사람이 의롭게 된다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고, 희생적인 삶을 사는 것을 불가능케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사람들의 실패를 증명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사람들을 율법 아래에 두셨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것 아래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큰 속박 아래에 있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은 여전히 율법의 속박 아래에서 계속 살기 때문에 아주 슬퍼합니다.

 

율법이 우리의 양심을 큰 속박 아래에 두고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상상하기 어렵더라도 오늘날 이러한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 여전합니다. 율법은 사람을 비난할 수 있을 뿐입니다. 주 예수의 십자가 사역은 율법을 다루셨습니다. 골로새서 2장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반대하는 법으로 구성하고 있는 빚 문서를 없애셨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것을 설명하시기 위해 구약성경에서 보아스가 행했던 것을 사용하신 것이 정말 놀랍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음날 아침 도시 문으로 가서 기다렸습니다. 중국어 성경은 우연의 일치로 말합니다. 하나님 안에는 우연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은 거기에 이 가까운 친척을 데려오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삶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스런 뜻에 기초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가엽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은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통제 아래에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방식을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안식하게 될 것입니다. 오랫동안 결혼생활을 한 부부는 그들이 잘못 결혼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우리에게 결혼은 하나님께서 합하게 하셨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 안에서 주의 깊은 계획에 따라 여러분 둘을 합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이해한다면 여러분은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아내를 내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런 남편을 내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해보십시오. 여러분의 남편이 기분이 나쁘다면 여러분은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아내가 계속해서 바가지를 긁더라도 여러분은 주님께 감사를 해야 합니다. 우습게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상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구원 받은 순간부터 모든 것이 성령의 통제 아래에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다스림은 큰 문제에만 제한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 있는 사소한 것까지도 성령의 통제 아래에 있습니다.

 

보아스는 이 문제를 공적인 문제로 다루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친척에게 가까운 와서 앉기를 요구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정말 공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개인적으로 일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문제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알려져야 했습니다. 우리는 보아스가 율법을 다룬 모든 과정을 보는 것을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썼을 때 그는 로마서 7:1~17절에서 십자가가 율법을 다룬 것에 대한 모든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의 속박 아래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보아스는 가까운 친척에게 앉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앉는다는 것은 서두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아스는 문제를 그 문제를 다루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과 함께 할 열 명의 장로들을 초대했습니다. 열 명의 장로들은 체험한 자들을 대표합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열 명의 장로들은 10계명을 대표는 것처럼 보인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율법이 구속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보아스가 그들의 형제 엘리멜렉의 땅을 구속하기를 원하느냐고 친척을 물었을 때 친척은 그가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율법이 상속에 관심 있음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구약에 주셨을 때 율법은 하나님의 상속을 보호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관심만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그 땅을 구속하기 위해 친척에게 말했을 때 동시에 룻도 구속해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로 이 모압여인을 취해야 했습니다. 물론 친척은 엘리멜렉의 땅과 룻을 구속하기를 거절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까? 율법은 죄인들을 동정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죄를 죄 없음으로 여길 수 없습니다. 율법은 율법이 의롭기 때문에 이와 같은 라합여인과 룻을 용인할 수 없습니다. 율법이 이러한 사람들을 받아들인다면 율법은 의롭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은 무법이 됩니다. 이것은 될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