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음료/새벽이슬처럼

“의복을 입다”

Hernhut 2014. 8. 22. 19:00

 

룻이 씻고, 기름을 발랐을 뿐만 아니라 합당하게 옷을 입었습니다. 룻은 신랑을 만나러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옷을 입으라라는 나오미의 말은 그 때를 위한 특별한 의복만을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이 사건은 보아스와 룻의 결혼으로 끝내는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룻이 입어야 했던 옷은 가까운 때에 반향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준비하는 것을 가리키는 룻의 준비는 마태복음 22:1~14절에 있는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사람은 어떤 왕의 아들의 결혼잔치에 합당치 않은 옷을 입고 나타납니다. 이 사람은 혼인예복 없이 나타납니다. 그런 그는 잔치자리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당했을 뿐만 아니라 어두운 바깥으로 쫓겨났습니다.

 

여기서 어두운 곳이라는 말은 달란트비유에서도 나타납니다(25:30). 달란트 앞의 비유는 관점은 다르지만 열 처녀 비유와 똑같이 다루고 있습니다(25:1~13).

 

마태복음 22:2절에 있는 어떤 왕그의 아들은 다름 아닌 바로 아버지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있는 어린양의 혼인을 둘러싸고 있는 잔치와 같은 장면입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19:7~8) 여기서 신부는 그녀가 만들어서 준비하여 가지고 있던 의복을 입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옷은 진열된 옷이라기보다 그녀 스스로가 만든 옷임이 분명합니다. 신부가 만든 옷은 고운 세마포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고운 세마포는 특별하게 성도들의 , 의로운 행실라고 말합니다.

 

룻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장차 신랑을 만나기 위해 합당한 의복을 스스로 입어야 합니다. 의로운 행실, 성도들의 웨딩예복은 그들의 부르심으로 신실함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웨딩예복이 만들어지는 동안 사역은 신실함에서 나오고, 또 합당한 그 목표를 위해 믿음을 가져옵니다(11:17~19, 31, 2:14~26, 벧전 1:9).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룻의 두 번째 준비, 즉 기름을 바름)은 웨딩예복을 만드는 의로운 행실을 수행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두 방법 중 하나에서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 나타날 것을 분명하게 계시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웨딩예복을 소유할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옷 입었다.”벌거벗었다.”라는 단어는 이 두 다른 방식 안으로 각 사람들의 모습을 구별하기 위해 성경에서 사용되었습니다(3:17~18, 8:35). 두 무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마태복음 22:10~13절에 따라서 다루어질 것입니다.

 

합당하게 옷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웨딩예복을 소유한 사람들)은 한 가지 방식을 따라 다루어질 것입니다. 또 합당치 않은 옷을 입은 사람들(혼인예복이 없거나 벌거벗은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질 것입니다.

 

합당한 옷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은 혼인잔치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어린양의 아내가 될 것이고, 그분의 왕후가 될 것이요, 그분의 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로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그 잔치에 들어갈 것입니다.

 

벌거벗은 사람들은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될 것입니다. 이들은 어린양의 아내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땅 위에서 그리스도의 일부로서 다스리지 못할 것입니다. 主護村成壬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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