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ethren/연(輦)모임 메시지

교회 안에서 건강한 관계를 증진시키는 방법

Hernhut 2013. 6. 27. 15:18

 

主護村成壬鉉兄弟

J자매와 M형제 둘 다 지도자들이었다. M형제가 지난 3년 동안 예배 팀의 지체로 있는 동안 J자매는 지난 몇 년 동안 소그룹 리더와 어떤 교회 사역자로 일을 했다. 모든 사람이 그들을 존경하는 것 같았다. 몇몇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그들의 완벽한관계를 보다 더 부러워하게 되었다. 학생들은 종종 J자매와 M형제 사이에서 보이는 관계에 대해 그들의 소망을 비교하곤 했다. 그들의 친구들이 감탄할 때 J자매와 M형제는 비밀스럽게 경쟁하고 있었다. 그들은 빈번하게 그들의 육체적인 방면의 관계에서 경쟁을 했다. 또 그들은 자신들의 합의가 된 경계를 벗어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성적인 죄에 깊이 휘말린 자신들을 알았다. 그들은 머지않아 그들은 좌절감을 맛보았고, 패배했으며, 외롭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실패에 대한 공적인 여론이 자신들의 동료를 파괴할 것이라는 것을 두려웠다. 결국 그들의 문제의 실체는 J자매가 임신함으로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그들의 교회는 경악하게 되었다. “어떻게 그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 교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우리는 이 교회를 떠나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 이야기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다. 성적인 죄의 충격은 교회의 구조를 찢는 것으로 망친 주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확장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오늘날 기독교의 많은 지도자들이 여기에 걸려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많은 젊은이들이 혼전관계에 빠지고, 많은 생활 속에서 또 다른 성적인 죄에 빠져든다. 여기엔 해결책이 없는 듯싶다.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고, 심지어 유명한 자가 되었다고 해서 이 성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예외가 없다. 나는 성적인 죄를 범하는 것으로부터 피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다.

 

 

하나님의 기준

()에 대한 표현에 있어서 너무도 자주 우리는 우리 성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을 이야기하기를 무시한다.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침묵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와 관련 있는 어떤 이야기를 둘러싸고 있는 것 같다. 말하는 것을 침묵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사람들은 그들이 자신들을 아는 것에 대해 싸우게 하고, 유혹하는 것을 다룰 기술이 갖춰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성적인 존재로 우리를 설계하셨다. 우리의 성생활은 우리가 결혼을 할 때까지 단지 끊어야 하고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성생활과 하나님께서 혼외동안 성생활을 하도록 하기 위해 주신 정하신 한계에 대한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흔히 데이트를 하는 관계에서 도덕적으로 애매하게 나타나는 부분은 좀 더 객관적으로 그것들을 볼 때 아주 분명해진다. 이것은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경건한 방법으로 대하는가?”라는 광범위한 질문으로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적이고 교회로서 우리는 성경을 찾는데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다. 우리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성생활을 위해 하나님의 설계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최우선적으로 우리는 데이트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의 신념과 원칙들 개발하고 증진시켜야 한다. 여러분의 신념과 원칙이 확고히 세워짐으로 데이트관계를 시작하는 것보다 데이트를 시작한 중간에 그러한 것을 개발하고 실행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젊은 미혼 청년들은 더 더욱 이러한 원칙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세워져야 한다.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은 절대 우리가 고립되어 살도록 의도하시지 않으셨고, 교회로 살도록 계획하셨다. 우선 우리의 공동체 체험은 우리의 가족 안에서 한다. 자라서 우리는 학교와 교회공동체의 지체가 된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된 것이요, 하나님의 가족의 지체인 다른 사람들과 교제 안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다. 주님은 그 방식으로 우리를 설계하셨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자기들의 수고로 인하여 좋은 보상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한 사람이 자기 동료를 일으켜 세우려니와 홀로 있는 자는 넘어질 때에 화가 있으리니 그를 도와서 일으킬 자가 그에게 없도다.”(4:9~10)

 

책임을 지는 것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순수와 온전함의 기준을 계속해서 유지하려고 한다면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책임관계는 아주 중요하다. 경건한 많은 사람들이 성적인 죄에 휘말리게 되는데 그것은 그들의 육체적인 관계를 위해 누구도 책임을 맡아 붙잡아 주는 이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Q.T.와 시간 경영에 관해 우리를 살펴주는 사람에게 묻는 것이 빠를 수 있지만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 이성과의 데이트를 하는 상황에 대해 책임무리들에게 내려놓는가? 아마도 많은 젊은이들은 숨기려고 하거나 책임무리들 보다 친구들에게 지나가는 말로 털어놓는 정도 일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성적인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격렬하게 묘사하는 어떤 것을 찾으려고 한다. 이와 반대로 우리는 얼마나 더 형제자매들의 도움이 필요할까? 우리가 그리스도인 생활의 기본적인 훈련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필요하다면 자주 이러한 것까지도 우리의 책임을 맡은 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런 부분에 있어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확실하게 가련하게 하는 것이요, 거북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우리가 우리의 관계 속에서 영광스런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처럼 필수적인 것이다.

 

책임관계는 형제는 형제들과 자매는 자매들과 형성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이 일대일 관계는 기도 동반자 관계처럼 기능한다. 그리고 일대일 관계는 종종 집중적인 기도에 포함시키지만 그것 또한 어려운 질문을 정직하게 묻고 답하는 것에 강한 약속을 요구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동반자 관계가 되도록 하실 것에 관해 기도하고 생각하라. 정직하게 묻고 답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동반자 관계를 맺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것은 책임에 대한 모든 목적을 파괴시킨다. 누가 여러분을 진실하고 정직하다고 신뢰하는가? 누가 어려운 질문을 할 만큼 여러분을 잘 아는가? 여러분이 신뢰하기에 충분한 사람을 찾고, 그에게 책임 맡을 것을 먼저 요청하라.

 

책임 동반자들이 생김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맡는다는 것이 쉽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학생들이 각자에게 요구하고 있는 질문들을 생각해 보자. “여러분은 어젯밤에 여자 혹은 남자친구와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가?” “여러분은 여러분이 세운 기준을 깬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어떤 것인가?” “여러분은 다음번에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여러분은 어떻게 각 사람을 믿음, 사랑, 순수함 안에서 격려할까?” 더 직설적으로 묻고 싶다. “당신은 섹스를 하는가?” “당신은 이런 질문에 대해 거짓말로 답변하는가?” 이런 질문들은 정말 용감하게 보일 수 있지만 여러분을 기도에 전념하도록 하는 신뢰하는 동료로서 표현했다면 그 질문들은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러분은 좋은 시간을 가졌는가?” “경계선을 넘게 하는 유혹을 받았는가? 받았다면 그 유혹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답해야 한다. 특히 젊은이들은 교회생활에서 책임 맡아 줄 개인적인 형제와 자매들이 필요하다.

 

 

배려와 용서

배려와 용서 또한 공동체를 건축하는 데 중요하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의 사역으로 특정된 것과 같은 동정과 용서를 확대해야 한다. 예루살렘 사람들(19:41~42), 마비된 사람(2:1~12), 간음을 저지른 여자(8:1~11)를 위한 예수의 긍휼하심을 생각하라. 예수님은 자신이 건강한 자들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병든 자들을 위해 오신 것이라고 설명하셨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여기에 빈번히 우리 동료와 우리 자신의 건강과 완전함을 제외시킨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위한 우리 자신의 절실한 필요를 아는 것에 실패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을 거절한다. 사람들은 매혹적인 예수님의 사랑을 알았고, 그분의 용서와 치유를 추구했다. 같은 방법으로 우리가 긍휼과 용서를 확대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필요와 따르는 성도들로부터 격려를 받는 것을 인정하는 것보다 더 쉽다는 것을 알 것이다. 반대로 사람들이 자신의 실패와 약점들을 판단할 것이라고 느낀다면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심지어 그것이 계속해서 실패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우리의 사역은 우리가 예수님을 추구하는 대로 서로 자극을 주고 박차를 가하는 것이다(10:24~25). 우리가 형제와 자매들의 필요를 도우려는데 있어 그들을 알기가 어렵다면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추구를 격려하는 것을 실패하게 된다. 동료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 너그럽게 대하는 것은 지체들이 자신들의 고통을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과 도움과 격려를 바라는 데 필요한 안정과 보호를 보장한다. 또한 이와 같은 공동체는 부정적인 사람과 부정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과 자신의 죄에 대해 굳어져 힘든 사랑에 필요한 것을 공급한다.

 

몇 년 전 나는 긍휼과 용서를 확대하려고 그 능력을 배양시켰던 한 지도자 팀에서 일했던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어떤 형제가 짜증스럽게 우리 팀 모임에 왔다. 그는 침울해 있었고, 그 모임 시간과는 마음과 생각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우리가 나눔의 시간으로 들어갔고 그는 이틀 밤을 교통했다. 그는 자신이 일했던 곳의 여자와 노골적이고 무모한 잠자리를 같이 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고통과 죄책감을 풀어 놓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도와 줄 것과 용서해 주기를 우리들에게 요청했다. 모임의 요점이 그의 주의로 모아졌다. 우리는 그를 위해 기도했고, 우리가 이 요점에서 그에게 어떻게 격려가 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우리는 그를 위해 우리의 사랑을 풀어놓았고, 그의 약한 부분에서 그를 책임 맡기 시작했다. 우리의 갈망은 그를 품고, 인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님과의 유대감으로 그가 회복되는 것을 보는 것이었다.

 

 

여는 것과 포용하는 것

우리는 관계에 있어 포용함으로 격려하는 정신을 우리의 모임에서 일구어 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몇 가지 것들이 유대감의 건강을 해치는 만큼이나 사람이 소속감을 위해서 이성에게 미련이 남아있어야 한다는 감정이 자란다. 우리가 격려해야 하는 유일한 애착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애착이다. 어떤 사람들의 요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와 자매들을 소외시키거나 막는다. 그것은 모임에 파트너를 데려와야 한다는 느낌을 지체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려고 하는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한번은 내가 큰 무리의 모임에 출석했다. 거기에는 두 지체를 제외하고는 모두 파트너가 있었다. 파트너가 없었던 두 사람을 아는 이유는 모든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고 있었고, 사실상 서로에 대해 의기양양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나중에 지체들과 함께 이야기하다 보니 그들은 그들이 불편함을 느꼈고, 소외됨을 느껴 파트너를 데려오지 않았던 것이다. 포용하고 여는 것에 대한 환경을 만드는 한 가지 방법은 관심에 대한 지나친 공동적인 드러냄으로부터 조심스럽게 파트너를 막는 것이다. 더욱이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정상적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는 사람들을 포함시키고, 알 기회로 크고 작은 무리에게 보여 주려고 지체들을 격려할 수 있다.

 

여는 것과 포용하는 것은 파트너가 없는 지체들을 위할 뿐만 아니라 파트너가 있는 지체들에게도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관계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공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파트너의 활동에 포함된 것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없을 때 그 커플은 자신에게만 집중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기회로 선용될 수 없다. 더 나쁜 것은 어떤 책임에서 표류하여 떠내려가 버린다는 것이다. 대신 우리는 지도자들과 지체들 가운데서 강한 우정관계의 발전을 격려하기를 원한다.

 

 

진실성과의 관계

예수님은 남녀의 진실성에 대한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과 문화적으로 반대가 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의 갈망은 사람들의 다양성과 관계된 우리의 능력 안에서 자라도록 서로를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의 차이를 배우게 해야 한다. 관계가 배타적일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배우거나 주려고 하는 가능성을 자르게 되는 것이다.

 

서로 책임을 맡는 공동체들은 동정과 용서가 확대되고 포용과 여는 것이 정말 드문 공동체들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과 같다. 이런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환상적인지! 우리는 이 공동체에서 우리의 관심을 공급할 수 있고, 서로에게 몰두하게 하며, 우리가 사랑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이것이 교회라는 공동체다.

 

여기서 예를 든 사람들은 익명으로 다루었으며, 이니셜로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