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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돌아오심을 위한 첫 사랑(아브라함)

Hernhut 2009. 1. 2. 11:16

주님의 돌아오심을 위한 첫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게 조금 책망할 것이 있나니 이는 네가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음이라.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기억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하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속히 네게 가서 네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4~5).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2:4~5).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는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음이니 이것은 그분으로 하여금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처음 나신 분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28~29).

 

2001년 9월 11일에 발생했던 일을 미국에 사는 사람 모두는 아주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그날 하나님께서 미국을 방문하셨던 날이라고 깨닫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미국에게 저지른 엄청나고 비극적인 공격을 생각해 보라. 그것은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 배후에 하나님께서 심판으로 이 나라를 방문하고 계셨고, 그러나 또한 자비로 방문하셨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하나님께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도록 이 나라의 사람들을 위한 깨어나라는 부르심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께 감사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났다. 그들의 마음이 부드러워졌고, 복음 듣는데 귀를 열었고 주님께 돌아왔다. 우리는 이미 주님께서 이 비참한 일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지?, 그분께서 그분의 사람들인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 고려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그분을 믿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사람들 즉 그들의 첫 사랑을 회복하도록 깨울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이 마지막 시대이고, 주님께서 곧 다시 오신다는 시대의 표징으로, 그들의 영 안에서의 감각으로 깨닫는다. 여러분은 그것을 믿고 있는가? 더욱이 우리는 그분께서 돌아오시는 동안 그분께서는 준비된 신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분은 그분의 사람들이 그분을 위한 순결한 처녀의 사랑, 뜨거운 소망, 그리고 갈망, 주의 깊은 믿음을 갖는 것을 필요하시다. 난 요즘 그분 자신의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말씀하시길 원하신다고 믿고 있다.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의 관계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의 관계는 전적으로 마음의 관계인데 그것은 사랑의 관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분이 우리를 보시고 계실 때 그분은 우리의 사랑을 찾고 계신다. 이것은 계시록 2장에서 에베소교회 안에서 무엇인가 찾고 계셨다는 것이다.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은 모범적인 미덕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선한 일을 많이 하므로 그분께서는 그들을 칭찬하셨다. 오늘날 적은 교회들이 그들과 견줄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은 그것으로 만족하실 수 없다. 그분께서 무엇인가 찾고 계셨던 것이 그들의 사랑이었고, 짝사랑이 아니라 진한 질적 사랑과 한없는 사랑이다. 그분은 그들이 가진 사랑의 종류가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으시다. 그분은 그들에게 말씀하셨고 또 그분은 우리에게 “나는 알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분은 사랑을 위한 우리의 마음을 찾고 계시고, 우리는 어떤 것으로도 꾸밀 수 없다. 그분은 우리의 사랑을 시험하시고, 맛보시고, 측량하시고 계신다. 우리는 그분을 위한 첫 사랑과 가장 좋은 사랑을 가지고 있는가?

계시록 2장과 3장에 기록된 일곱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부활은 한번 언급된 것이 아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배가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부활은 중요한 기도의 관심과 주제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사람들이 부활됨을 보고서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게 말씀하실 때 사용하고 계신 주님의 말씀은 부활이 아니라 아홉 번의 회개이다. 이 일곱 교회는 우리의 상징이고 오늘날 땅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말한다. 우리 모두의 필요는 그분을 위한 우리의 가장 좋은 사랑을 갖기까지 회개하고 회개하는 것이다.

회해하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회개하는 것은 “u-turn"을 의미한다. 여러분은 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여러분이 돌아서 다른 길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분을 위한 우리의 사랑에 관하여 우리 마음 안에서 회개를 할 필요가 있다. 많은 시간동안 우리는 아마도 매일 이것을 해야 한다. 주를 위해 가장 좋은 사랑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의 사랑을 위해 미지근하게 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사역에 더 높고, 더 강한 힘이 아니라면 우리의 사랑은 거절될 것이다. 나는 이 항목에서 서로 나누는 것을 부담이 있는데 그것은 그분을 위한 우리의 가장 좋은 사랑을 유지하고 회복하는데 우리를 돕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첫사랑을 잃는 것을 포함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해결책을 가지고 계신다. 그것은 그 자신과 그분의 아들의 신선한 계시를 우리에게 주시고 계신다. 그러므로 계시록 1장에서 교회들에게 계시하시기 전에 그분은 그리스도의 무섭고 전례 없는 환상을 주시고 계신다. 그 계시를 바탕으로 그분은 일곱 교회들 각각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셨고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1장에 있는 그분의 계시의 어떤 관점이 모든 교회에게 그분의 메시지에 인용되어 있다. 그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염려는 교회들과 우리를 이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에베소 안에 있는 교회가 무엇을 필요로 했는지 와 오늘날의 우리의 필요가 무엇인지는 그리스도의 신선한 계시이다. 우리의 첫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전에 결코 볼 수 없었던 그리스도의 어떤 것을 볼 필요가 있다.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까지는 주 예수를 본적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아마도 이 메시지를 읽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도 요한은 많은 시간 동안 주 예수를 보았었고, 어떠한 사도들보다 더 혹은 그들만큼은 그분을 알고 있었다. 요한은 예수와 아주 친밀했고 그분의 가슴에 기대고 자신을 사랑하는 예수의 제자로 부르도록 했다. 그러나 요한이 계시록 1장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보았을 때 그는 죽은 것 같이 주님의 발밑에 엎드렸다. 요한은 결코 그 같은 주를 볼 수 없었는데 주님의 생명 즉 그분을 일으키심으로 만져 주심이 필요했다. 나는 주님께서 아주 알맞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님 자신을 알려 주실 것이며, 살리시고 힘주실 것이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종말에 온전히 세워질 것이며, 부활의 삶과 활력은 우리에게 전해질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볼 필요가 있는가? 나는 우리가 만일 그분을 위한 우리의 첫사랑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새롭게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분의 놀라운 신성하고도 신선한 사랑의 계시가 필요하다. 우리는 때때로 위대한 찬송을 부르는데 “하나님의 사랑은 글과 혀로 말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하시도다.”우리가 그것을 설명하려고 시도할지 모르나 불가능하다. 그분의 자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우리가 본 적이 없었던 그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드러내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 뒤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우리가 창조되지 않았고 타락의 어떤 종류로부터 진화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사탄으로부터 온 거짓말이라고 알고 있다. 이 너무 복잡하고 형언할 수 없게 거짓말 같은 멋진 우리의 몸은 배후에 끝없는 지혜와 기술로 인한 거대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그 뒤에는 그것보다 더한 것이 있다. 우리의 창조 뒤에는 위대한 마음과 사랑이 있다. 큰 사랑이 있는 우주의 중심에는 모든 것을 위한 이유가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의 동기와 설명이다. 모든 창조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나왔는데 모든 것들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 졌으며,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그분의 사랑을 심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창조되었는데 그분의 마음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 때문이다. 더욱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 위에 기반이 돼 있다. 그것은 사랑의 하나님과 찾으시는 하나님 등이 어떠한 하나님이시냐를 입증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들과 그분의 움직이심과 심지어 그분의 진노 안에서도 모든 영감의 말씀을 통해서 밝혀져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그분께 그렇게 설명할 수 있다. 그분은 우리를 갈망하고 계시고 우리를 동정하고 계신다. 그분은 그분 자신을 위해 우리를 얻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를 얻으셔야만 하신다. 그분의 사랑 때문에 그분은 말로 다할 수 없는 멋진 뜻을 목적으로 가지고 계신다. 주님께서 그분 사랑의 목적보다 더 우리에게 보여주실지 모른다.

 

성경은 이 위대한 목적을 말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예정하셔서 미리 아신 자들을 자신의 아들의 형상이 되게 하셨다고 했다(롬8:29). 그것을 생각해 보라. 여러분과 나를 고려해보면 삶과 실제와 말속에서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처럼 될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놀랄만한 깊은 감동이 필요하다. 우리 자신이 아는 것은 기절할 정도인데 우리가 그분과 같이 될 것이다. 그분의 사랑 안에서 그분은 그렇게 하시기로 결정하셨고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시다. 그분은 그렇게 하시는 것이 사실이시다.

 

때로는 우리가 공항을 떠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나 자매를 만나도록 부르심을 입는다. 전에 만나거나 본적이 없었던 사람과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렇게 많은 승객들 가운데서 형제와 자매를 찾아낼 수가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어렵지가 않다. 우리는 다만 예수와 닮은 어떤 이를 찾을 필요가 있다. 이것은 옳은 것이다. 나는 이런 경험을 여러 번 했다. 그들이 완벽한 닮은꼴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들에게는 예수의 어떤 것이 있다. 그러나 어느 날 우리는 완벽하게 그분과 일치될 것이다. 내적으로 우리는 생활과 성격 안에서 같게 될 것이며, 외적으로 우리 또한 같게 될 것인데 그분께서 영광의 몸을 가지실 것이며, 또 우리는 역시 하나가 될 것이다. 이것이 그분의 사랑의 이야기이고 목적이다.

 

 

사랑의 관계의 다양성

히브리서 2:11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우리 둘 다 같은 근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데 “우리 모두는 하나이다.” 이런 까닭으로 “그분께서 그들을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라고 말하고 있다. 주께서 부활하셨을 때 그분은 마리아에게 “나의 형제들에게 가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사랑과 삶의 매우 친밀한 관계가 있는 그분의 형제들이다.

또한 시편 45:7과 히브리서 1:9로 함께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께서 즐거움의 기름을 주에게 부어 주의 동료들보다 높이셨나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동료이거나 아니면 동료가 되어야 한다. 주님은 특별히 마지막 시대에 동료들을 얻기를 크게 갈망하신다. 우리의 존재인 그분의 형제들은 같은 삶과 실제가 분배되어 있는 그분께 우리와 같은 말을 한다. 우리의 존재인 그분의 동료들은 사업의 파트너로서 우리의 공동의 관심과 목표를 나타낸다. 그분은 우리를 그분의 동반자들로 만들고 계시고, 또 그분의 관심들로 삼으신다. 우리가 그분의 우주와 영원한 사업 안에서 그분의 동료가 될 수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주님은 또한 그분의 친구들을 찾고, 만드시고 계신다. 그분은 그분의 제자들에게 “내가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주인이 하는 것을 종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오히려 내가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이는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15:15).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친구를 찾고 계신다. 오랜 시간 동안 우리는 “우리는 너무나 친한 친구 예수를 가졌네.”를 찬송으로 노래를 해 오고 있다. 참으로 그분은 멋진 친구이시다! 우리의 친구로서 그분을 갖는 것은 매우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친구로서 우리를 원하신다. 아마도 그분은 만일 나는 너무나 친한 친구 oo를 가졌네를 노래하지 않는다면 감동하실 것이다. 그분은 아브라함을 “나의 친구”(사41:8)고 부르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 안에서 참된 우정을 찾기 위해서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분은 아담과 이브가 그분의 친구가 될 것이라고 소망을 가지셨는데 마귀는 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움켜잡아 멀리 강탈해 갔다. 하나님께서는 크게 실망하셨다. 그러나 그후에 그분의 훌륭한 일을 통해서 친구들을 찾으셨다. 여러분의 마음을 알고 있는 한 친구가 있다. 좋은 친구는 여러분의 생각과 느낌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다. 그는 여러분을 알고 또 사랑한다.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마음 안에 무엇이 있고, 그분의 뜻이 무엇이며, 그분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아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은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그분을 아는 우리를 원하신다. 그분은 친구들을 찾고 있으신데 그분은 영적인 지혜가 충만한 친구의 “인생행로”를 갖기 원하신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것이 더 있는데 그것은 그분은 그분의 신부가 될 우리를 원하신다. 신부는 사랑의 친밀감을 말해준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아들의 신부가 될 우리를 원하시는데 그분의 형제들, 그분의 동료들, 그분의 친구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사랑 안에서 가장 높은 우리관계의 신부를 얻기 원하신다. 신부는 우정보다 앞선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것을 잘 생각해 보라. 어떤 사랑이 필요한가! 반드시 처음 사랑과 가장 좋은 사랑을 그녀와 함께 준비될 신부를 위한 날들이 있다.

 

4가지 첫사랑의 사례들

구약에 4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첫사랑의 훌륭한 사례들이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깊은 사랑의 관계를 갖고 여러 방법으로 시험받고 처음 사랑의 4가지 측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첫사랑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를 볼 수 있는데 그들을 보기로 하겠다.

 

 

1. 아브라함

주님께서 타락으로 인하여 사람을 잃어버린 후 그분을 사랑하는 다른 사람을 찾으셨다. 그분은 아브라함을 찾으셨고 그분은 그를 자신의 친구로 부를 수 있으셨다(대하20:7). J.N 다비는 주석에서 말하기를 “그분의 친구 아브라함”은 또한 “아브라함은 그분을 사랑했다”고 번역될 수 있다고 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하나님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그분을 했다는 의미이다. 아브라함은 특별히 우리에게 믿음의 말을 하는데 그는 “믿음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롬4:11). 믿음과 사랑은 항상 함께 가는데 그것들은 분리될 수 없는 두 자매들이다. 믿음 없이는 사랑을 가질 수 없고 사랑 없이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좋은 본이 되었고 하나님과의 깊은 사랑의 친밀한 관계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살아가는 기간 동안 계속해서 그분을 신뢰하고 주를 의지하는 것을 배웠고, 그의 생애를 마치기까지 그의 믿음과 사랑은 완벽했었다. 그가 하나님의 마음 안으로 그의 제사를 드림으로서 의롭게 되었을 때 이삭을 얻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계획으로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땅의 모든 나라를 그 안에 복이 되도록 할 것이라고 하셨다(창12:3). 그분은 또한 여러분과 나를 위해 커다란 목적을 가지고 계신데 그 목적에 따라 그분은 우리를 부르셨다. 이것은 로마서 8:28에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인데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다. 이 구절은 선을 위한 함께 일하는 모든 것들을 위해 자격이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그분의 목적을 통해서 부르셨다.

 

우리는 여기서 선은 무엇이며, 모든 것들은 무엇을 위해 함께 일하는 것인가? 두 가지 질문을 해야 한다. 또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무엇인가? 다음 구절에서 두 가지 질문의 답이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음이니”(롬8:29)고 했다. 그리스도께 준수하는 자가 되는 것은 가장 큰 것은 “선”이고 그것은 그분의 훌륭한 “목적”이다.

그 목적을 성취하실 하나님을 위해 그분은 “모든 것들”을 하셔야 할 필요가 있으시다. 그분은 우리를 모든 환경들과 상황들 안으로 밀러 넣으셔야만 하고 우리를 어떤 조건을 붙어 있는 사람들의 주변 상황에 넣으시고, 매우 개성적인 아내와 남편, 특별하게 알맞은 아이들과 또 올바른 이웃들을 주셔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분은 합력하여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 이 모든 일들을 사용하실 것이다. 많은 시간적인 이 상황들은 많은 방법들로 고통당하는 이유이고 매우 어려운 것인데 우리의 문제이다. 우리는 가끔 우리가 언제나 관리와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궁금해 한다. 때때로 우리는 건강과 다른 때에는 차로, 자주 배우자로, 아이들로 고통을 겪는다. 내가 알고 있는 형제들과 자매들은 많은 눈물로 슬퍼하고 그들의 아이들로 비탄에 빠졌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해결하시는데 그분께서 우리가 고통을 받는 것을 전혀 좋아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오로지 의존하는 것과 믿음을 갖는 것을 배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기로 약속하셨고, 아브라함은 아이 없이 많은 해를 보냈다. 후손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아내는 제안(이브처럼 사라는 제안을 받는 것을 아주 잘했다.)을 가졌다. 그녀를 복종케 함으로서 아마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작은 도움을 주기 원했고 그녀를 충고함으로서 아브라함은 하녀를 품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만 그분만을 의뢰하는 우리를 원하시고 기다리신다. 이것이 믿음이다.

 

미국에는 모든 동전과 지폐에 "In God We Trust" 라고 쓰여 있다.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삭제하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마귀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우리를 원치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더 깊게 이 말씀을 새기시고, 비록 그 결과가 그 문구가 지워진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분 안에서 신뢰할 것이다. 주님의 일을 기억하십시오. 아마도 그분은 심지어 여러분과 내가 고통 받는 것보다 더 고통 받으실 것이다. 욥이 말하길 “그분께서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분을 신뢰할 것이요”(욥13:15)했다. 사랑하는 형제 사무엘 러더퍼드는 1600년대에 고통을 받았다. 그가 말하기를 “비록 그분께서 10,000번을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분을 신뢰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것이 믿음이요, 사랑이다. 러더퍼드 형제는 주님을 너무 깊이 사랑했었고, 그의 믿음은 크게 확산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 기간을 신뢰한다면 그분을 사랑하기에는 쉽다. 우리가 믿음이 부족하다면 우리는 사랑도 부족할 것이다. 우리가 믿음이 결핍하면 그분을 사랑하기에 자유롭지 못하고 몹시 싫어한다. 믿음은 우리는 평화가 있고 사랑으로 근심하는데 쓰이는 힘을 변화시킨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훈련이었다. 그분은 그것을 잘 배우도록 도와주셨다. 아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실지 모르겠다. 믿음은 커다란 동료이고 첫사랑의 종이다.

아브라함은 믿음과 사랑이 자랐고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제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네 유일한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주는 산들 가운데 하나에서 그를 번제 헌물로 드리라”(창22:2)고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이것보다 더한 시험이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에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창22:3a).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났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믿음의 순종과 사랑의 의지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데리고 그를 드릴 장소로 갔다. 그를 죽이려고 그의 칼을 잡았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막으며 “자기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 하더니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므로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그가 이르되, 네 손을 그 아이에게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이는 네가 네 아들 곧 네 유일한 아들이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이제야 비로소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줄 알기 때문이니라.”(창22:10~12)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이것으로 입증하셨다. 이것을 분명하게 신약성경에서 첫사랑이라 부른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마음 안으로 깊이 들어갔고, 사랑 안에서 그분은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을 주셨고 그분의 죽으심을 멈추지 않으셨다. 히브리서 11장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하셨던 예시로 하나님께서 죽음으로부터 그분의 아들을 일으키셨던 것을 아브라함의 믿었던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이것이 첫사랑에 대한 아브라함의 사례이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단계의 방법 모두를 쫒아가 보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에 결코 가본 적이 없는 영적인 장소요, 본적이 없는 곳, 그분께서 아브라함에게 행하셨던 곳으로 가기를 원하시고 계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행했을 때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완성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