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아버지 아브라함 시대에 그들이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뒤에 블레셋 사람들이 그 우물들을 메웠기 때문이더라. 그가 그 우물들의 이름을 자기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창 26:18). 다시 우물을 파는 것은 우리의 육체와 천연적인 생명과 함께 우리의 끊임없는 필요가 다루어져야 함을 상징합니다. 우물들은 흙을 제거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파야 했습니다.
문제는 뿜어져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항상 흐르시고 계십니다(시 36:9).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 안에서 흐르시도록 하기 위해 다루어졌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육체요, 천연적인 생명입니다. 우리가 파면 팔수록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는 더 흐르십니다.
우리는 매일 부지런히 파야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우물이 멈출 때를 모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의 우물을 쉽게 멈추게 할 수 있는 진흙으로 가득합니다. 완전히 진흙을 제거하면 우리는 세상을 떠나야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진흙은 계속해서 찾아올 것입니다. 살아있는 물이 계속해서 흐르게 하는 비밀은 모든 시간에 진흙을 파나는 것입니다. 안에 있는 생명의 흐름이 차단될 때 우리의 육체, 천연적인 생명, 그리고 세상을 다루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영, 말씀읽기, 기도하기, 교제하기로 돌아가고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 날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부어질 것이고, 우리가 영원히 영광스럽게 될 것이라는 꿈을 꾸지 말아야 합니다. 이 생명 안에는 이런 꿈은 없습니다. 젊은 성도들은 그들이 구원받은 오랜 뒤에 생명의 흐름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들은 파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물이 우리의 영 안에서 계속적으로 흐르기는 하지만 가끔 우리는 그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진흙을 제거하기 위해 파야합니다. 성령의 흐름에 대한 우리의 체험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이건 간에 우리는 파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