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에서 말하는 것들
마태복음 13장은 주님께서 말씀하셔야 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들으려고 해변가로 모인 군중들로 시작한다. 하지만 주님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은 그분의 가르침을 의도적으로 그들에게 분명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였다(마 13:13).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의아해 할 것이다. 성경을 읽을 때나 메시지를 들을 때는 나와 같은 이야기로 이해하지 않았는데 이 저자는 왜 이런 이야기를 할까?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의도적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불공평해 보인다. 심지어 그분의 제자들까지도 이런 전략에 관해 그분께 질문했다.
“주님, 당신은 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까?”(마 13:10)
우리가 이 비유들을 읽을 때 우리는 해변가에 앉아 있는 군중들 같다.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셨던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다. 우리는 불평할 수 있다.
“주님, 왜 당신은 평범한 말로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우리 같이 어리석은 사람들은 차원 높은 말은 알아들을 수 없어요. 풀어서 말씀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군중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백성의 마음은 무디어지고 그들의 귀는 듣기에 둔하며 그들은 눈을 감았나니 이것은 언제라도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회심하여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느니라.”(마 13:15)
다른 말로 말하면 그들은 보고, 듣고, 깨닫기를 원치 않았다. 이것은 우리에게 경종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분명해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주님은 불분명하게 하신다. 그분을 불평하지 말라. 문제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시고, 그에 맞춰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를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아신다. 우리는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드린다고 그분께 말한다. 우리는 그분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도록 요구한다. 하지만 오히려 주님은 그분께서 더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비유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젊은 청년이 젊은 처녀와 데이트를 하고 있을 때 비유로 말할 것이다. 그는 달콤한 부부로 행복한 나날을 살 자기의 꿈을 말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이 갖추어진 아파트에서 사는 꿈을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함께 요리하고, 함께 일을 하고, 손을 붙잡고, 사랑 안에 있을 날을 꿈꾼다. 처녀가 남자친구가 한 말을 알지 못한다면 그녀는 말할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언젠가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녀는 자기가 불분명하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불분명한 것이다. 그녀가 이미 남자친구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면 그녀는 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았을 것이고,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이것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의미다. 말씀하시는 분은 우리가 깨닫기 원하신다. 다만 깨닫기 원하는 이들만 주님의 말씀을 깨달을 것이다. 이미 우리는 행동방침을 결정했다. 그 행동방침이 우리에게 불분명하게 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어떤 것을 바꾸라고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