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예수의 심정으로 성도들을 돌봄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너희 모두를 얼마나 많이 그리워하는지 하나님께서 내 증인이시니라.
—빌립보서 1:8
그리스도 예수의 심정
심정이라고 표현해 놓았지만 이 단어는 “도타운 사랑, 동정, 애정, 긍휼” 등으로 번역하는 것이 우리말에 더 좋을 듯싶다. 헬라어 “스플랑크논splagchnon”은 동정의 느낌을 가장 강하게 나타내는 단어요, 느끼는 위치 즉 내면을 나타내는 단어다. “스플랑크논splagchnon”는 또 내적인 애정, 깊은 자비, 동정 등을 의미한다.
주님은 우리를 내적인 애정으로 사랑하신다. 이것은 깊은 긍휼을 포함하는 사랑이다. 주님께서 긍휼하심이 없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우리는 아마 불로 심판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주님께서 긍휼하시고, 동정이 있으시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에게 “난 너를 이해한다. 난 네가 겪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다.
주님은 죄가 없으셨고, 육체를 따라 세상을 사랑하시고 사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를 완전히 이해하실 수 있으셨다는 것에 궁금해 한다. 하지만 주님은 그분께서 긍휼과 동정이 가득하시기 때문에 이해하신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항상 그분께 올 수 있다. 우리가 주님을 부르기 원하지만 우리가 자격이 없음과 부끄럼을 느끼기 때문에 엄두도 못 낼 때 주님은 깊고도 깊은 긍휼과 동정을 가지시고 계신다. 그분의 내적부분은 애정, 도타운 사랑으로 채워져 있다. 그분은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을 사랑하시고 아시고 계신다. 그분은 긍휼은 우리의 필요를 따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항상 은혜를 위해 그분께 올 수 있다.
빌립보 성도들과 바울의 관계는 천연적인 애정이 아니었고, 그리스도의 가장 깊숙한 존재에 따른 것이었다. 이것은 성도들을 향한 가장 깊은 것이었다. 우리가 천연적인 애정을 따라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우리의 사랑은 그들이나 그들이 행한 것에 영향을 받는다. 서로를 향한 우리의 사랑스런 돌봄은 주님의 깊은 내적부분을 따른 것이어야 한다.
바울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내적부분에 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들을 갈망하신 그 갈망으로 빌립보 성도들을 갈망했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천연적인 애정으로 절대 거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오히려 주님 안에서 거하기를 추구하고, 주님의 깊고 깊은 부분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빌립보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갈망
바울이 주님의 내적부분에 있는 그분을 만졌을 때 그는 주님께서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을 얼마나 많이 추구하셨는지를 알았다. 이것이 또 그가 빌립보 성도들을 추구하는 까닭이었다.
“갈망하다, 사모하다”라는 의미의 헬라어는 “에피포테오epipotheō”다. 이는 “동경하다, 열망하다” 뜻하는 단어다. 우리는 주님 자신께서 무엇을 갈망하시고 사랑하시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분은 주로 지역교회를 표현한 교회를 돌보신다.
지역교회들은 오늘날 이 땅 위에서 그분을 증거한다. 그들은 그분의 표현이므로 주님께 귀한 존재들이다. 바울이 기도를 하고 그분의 가장 친밀한 부분,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갔을 때 바울은 주님의 갈망을 만졌다. 바울 자신의 내적부분은 주님에 의해 만져졌고, 그는 빌립보 성도들을 갈망하고 사모했다. 바울이 그들을 위해 추억했고, 간청을 했기에 이 갈망이 바울 안에서 증가되었다(빌 1:3–8).
주님의 내적부분을 따라 사람들을 돌봄
사람들을 위한 우리의 돌봄은 부담을 따른 것이 되지 말아야 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의 내적부분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내적부분에서 빌립보 성도들을 갈망한 방법은 우리에게도 같은 패턴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가끔 우리가 섬기는 성도들이 변화되기를 바라지만 그들이 변화되지 않아 좌절한다. 그들을 위한 우리의 관점은 옳을 수 있지만 우리의 마음을 옳지 못하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내적부분을 체험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큰 비결을 배웠다.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 없이 영적인 일을 행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사람들을 위한 우리의 돌봄에서 특별하다. 성도들이 섬김을 받는 것과 다르게 섬기려고 할 때 우리는 정말 부담을 갖게 된다. 우리는 그들을 위한 아주 많은 체험이 있다. 또 우리는 우리의 표준에 그들이 이르게 하려고 한다. 우리가 옳을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틀린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주님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어떤 것이 잘못 될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내적부분에 왔다면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성도들을 위해 깊은 긍휼과 동정을 찾았을 것이다. 우리가 성도들을 위해 주님의 돌보심을 훈련할 수 있는 것은 이 긍휼과 동정에만 있다.
주님의 내적부분은 사랑, 긍휼, 온유, 동정으로 채워져 있다. 그분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넓으신 분이시다. 우리는 “일을 하려면 제대로 하든지 아니면 그만두든지 해라!”는 식의 태도로 다른 사람들을 절대 섬기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을 돌보는데 긍휼과 온유가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내적부분을 겪지 않은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우리에게 “나는 너무 메말라 보여. 주님께서는 내게 풍성하고 참되신 분이 아니신가봐.”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당신은 오늘 아침에 성경을 읽고, 기도 했나요? 하지 않았죠? 당신이 메마른 것에 놀랄 일이 아니예요. 당신이 풍성치 않은 건 당신 잘못이예요.”라고 말하는가? 그렇다 그가 오늘 아침에 주님과 시간을 가졌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가 영적으로 메말라 있다면 그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우리의 반응은 주님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가? 그가 살아있는 것이 우리의 갈망이지만 우리의 태도는 너무 잘못된 것이다. 이런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내적부분을 만지지 못한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던 우리를 비난하지 않는다. 대신 성경은 사랑하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의 깊은 사랑, 긍휼, 동정을 전달한다. 성경은 깊은 사랑, 긍휼, 그리고 동정이 주 예수님께 온다고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말한다. 그분은 우리를 회복하시고, 용서하시고, 치료하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긍휼하심과 동정하심을 가지신 대제사장이시다(히 4:14–6, 7:25). 우리가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 그분은 공급하신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지키시고, 돌보신다. 주의 마음에는 아주 많은 도타운 사랑이 있다. 우리가 주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고, 그분의 내적부분에 깊이 들어 갈 때 우리는 그분의 형상을 얻는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향해 깊어지고, 긍휼을 갖게 되고, 동정을 갖게 된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의 내적부분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돌본 사도바울처럼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