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음료/새벽이슬처럼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Hernhut 2025. 6. 17. 00:19

 

 

그러므로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곧 만지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썩어질 것이요 사람의 계명과 교훈을 좇은 것이라 이런 것들은 자의적 종교와 거짓된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육체의 탐욕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없느니라(골로새서 2:20-23)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율법을 지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거의 전적으로 집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도 바울은 율법주의의 본질을 철저히 알고 실천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율법주의적 종교를 완벽하게 묘사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 말라...율법주의적 종교는 항상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보다 무엇을 하지 않는지에 따라 정의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교회는 도덕적인 종교입니다. 우리 교회 신앙에는 명확한 도덕적 경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긍정적인 행동을 하는 종교입니다.

 

바울은 율법주의를 초월하여 사는 비결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초등 원리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것(골로새서 2:12에서 앞서 언급했듯이)이 율법 준수가 아닌, 우리 그리스도인 삶의 기초가 됩니다.

 

율법을 지키는 삶은 사용하면서 썩어 없어지는 것들에 집중합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만지거나 먹습니다. 그것들은 사라지는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가장 중요한 것, 궁극적인 실체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진리는 우리가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에 대한 어떤 규칙이나 율법주의의 다른 어떤 측면보다 더 위대합니다.

 

율법주의는 모두 사람의 계명과 교리에 따라 배열됩니다. 인간의 규칙과 주장된 진리가 하나님의 율법과 진리보다 더 강조됩니다. 바울이 이러한 것들에 대해 쓴 내용은 사실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지혜로운 것처럼 보이지만육신의 탐닉을 막는 데는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성경에서 율법주의에 대한 가장 큰 고발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율법주의의 규칙들은 육신의 탐닉을 억제하는 데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그러한 모든 율법주의적 규칙들은 겉으로 는 지혜로워 보일지 몰라도, 진정한 가치는 없습니다. 율법주의는 육신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교묘하고 강력한 방식으로 육신을 부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가장 종교적인 사람들이 견딜 수 없는 교만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악마는 당신을 율법주의적이고 교만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당신이 종교에 심취하는 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만든 모든 종교, 즉 하나님께 나아가는 인간, 즉 규칙들을 지키며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종교를 거부해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해 사랑으로 인간에게 다가가는 하나님입니다. 오늘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교만을 버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