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느냐 사느냐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말했다.
“내게는 사라는 것이 그리스도시오, 죽는 것이 유익이라.”(빌 1:21)
역사 속에서 이와 같이 말한 사람이 없고, 바울이 행한 방식으로 그것을 의미한 사람이 없음을 안다. 한 면에서 그는 그리스도를 풍성하게 누리는 것에서 자신이 돌이킨 모든 것에서 떨어져 나오기를 갈망했다. 그는 단순히 순교의 순명(順命)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어떤 고귀한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바울은 주님을 여러 해 동안 알았고, 체험했다. 하지만 주님을 풍성하게 알고 체험하는 장벽이 그를 막고 있었다. 그가 100% 예수님과 함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의 육체적인 존재의 한계에서 느슨해지는 것이었다.
바울과 같은 영적인 형제들조차도 그가 부분적으로만 알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전 13:9). 그러므로 그는 영원히 주님과 하나 된다는 확신을 풍겼다. 그에게는 주님을 거울로 희미하게 보는 것이 육체로 사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고 여겼다(고전 13:12).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에 어느 정도 고통을 겪는다. 그리스도인들도 종종 죄를 짓는다. 죄를 짓는 그리스도인들은 반복적으로 짓는 죄를 고백하러 주님께 나아와야 한다. 하지만 어느 날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얼굴을 맞대고 풍성하게 그분의 임재를 누릴 것이다. 그런 고귀한 삶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주님과 함께하는 교제를 누릴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은 또 다른 생각으로 빌립보 성도들과 그들의 필요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빌립보 성도들을 생각했고, 그와 그들이 서로의 마음에 두었을 때 그는 자신의 육체가 살아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 더 필요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을 위해 그는 남았을 것이고, 그들의 전진을 위해 계속 그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믿음 안에서 기뻐했을 것이다.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과 함께 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들의 전진이 멈추지 않는 것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또 그 반대의 상황에서는 성도들을 앞으로 향하도록 이끌 수 있었을 것이다. 바울이 죽느냐 사느냐는 카이사르 네로에 달려있었지만 네로는 단지 주의 주님의 손에 달려 있었다. 바울은 주님께서 교회들과 함께 하려고 하는 바울의 갈망에 따라 일하실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바울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었다. 그의 논리는 하나님의 갈망하심과 일치했다. 그는 주님 앞에서 죽어야 할지, 아니면 살아야 할지를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그는 땅에서 계속 수고하기를 선택했다. 이렇게 땅에서 수고하기로 한 것은 이런 선택이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이었음을 그가 알았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바울이 유일하게 붙잡은 것은 믿는 성도들이었고, 지역교회들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와 같은 마음을 갖기를 주님께 구해야 한다. 또 빌립보 성도들과 같은 신실한 성도들이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하시고, 믿는 성도들을 위해 살게 하소서.